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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8

SPECIAL

[밑줄의 일부] <4월 이야기>(이와이 슌지, 2000)와 신형철 평론집 《정확한 사랑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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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이야기>(이와이 슌지, 2000)와 신형철 평론집 《정확한 사랑의 실험》
 

이지혜

영화평론가, 문화평론가
 
 

Emotion Icon<밑줄의 일부>는 영화와 드라마, 문화현상의 인문학적 고찰에 대한 에세이가 담긴 코너입니다.

 

 

 

 

*

 

 

 

 

청춘의 다른 이름은 ‘없음’이다.

시간 없음, 여유 없음, 미래 없음, 그래서 청춘 없음.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이후, 매년 3월마다 스무 살 언저리의 새 얼굴들을 만나고 있다. 강의실엔 학교 필수교양인 글쓰기 수업 중 '학술적 글쓰기'에 대해 배워보겠다고 수강 신청을 한 학생들 스무 명 남짓이 다글다글 모인다. 강사인 나의 말 한마디를 놓칠세라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피씨의 녹음기를 켜놓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내가 하는 말이 좋아서는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성적 때문에 바짝 쫄아있는, 혹은 각자의 사정에 밤잠을 못 이루고 피곤에 찌든 채 나타난 눈동자들을 두 해쯤 바라본 나는 이번 3월 개강에 한정해 한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강정정기간이 끝난 뒤 공지했다.

 

 

 

공지

 

 

다들, 우리 학교 벚꽃이 유명한 건 알고 있지요? 

여러분께 벚꽃권을 드립니다. 

벚꽃권은 교정에 벚꽃이 한 송이라도 맺혔을 때부터, 

벚꽃이 한 송이라도 남아있을 때까지 사용할 수 있는 수업 결석권입니다. 

반드시 해당 시간에 학교의 벚꽃을 보고 있는 모습이 드러나게 사진을 찍어 

이메일 등으로 인증해 주세요. 그리고 간단한 감상을 남겨주세요. 

여러분이 제 수업 시간을 빼먹고 학교의 벚꽃을 보는 경험을 꼭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매시간 수업자료는 인터넷 캠퍼스에 올려둘 테니, 

결석한 요일의 수업을 나머지 공부하고서 질문이 있다면 편하게 질문하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대부분 학생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3월 둘째 주 교정의 나뭇가지는 초록의 기운 없이 앙상하기만 했다. 기대 어린 눈빛과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동자들이 어지럽게 마주치는 사이, 학생들과 나. 우리는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학술적 글쓰기'는 학술논문과 에세이를 결합한 형식의 수업이다. 사회의 다양한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세워 논리를 펼치는 글을 형식에 갖춰 쓰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본적으로는 교재의 커리큘럼을 사용하지만, 교재대로 수업을 하면 학생들은 어려워했고 쉽게 집중력을 잃었다. 조금 더 쉽게 글쓰기 규격을 체득시킬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한 끝에 영화와 평론을 활용해서 수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영화평론가 겸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활용해 가르쳐 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공통된 소재를 다 같이 뜯어보고 분해하며 형식에 맞춰 자신의 감상을 펼쳐본 후, 논리를 세우고, 그것이 일반적인 감상문과 어떻게 무엇이 왜 다른지를 구분한 후 학술 에세이 단계로 나아가는 교수법을 세웠다.



 

 

4월은 궁금한 것투성이

평론이나 연구의 재료가 꼭 영화나 책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왕이면 영화나 책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의 청춘은, 그러니까 스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나의 시간은 영화와 책으로 반쯤 점철되어 있었다. 혼자서도 보고 함께 보기도 했다. 스무 살부터 이어진 "영화를 함께 보자"는 말의 뜻은, 혹은 "네가 좋아하는 책이 궁금하다"는 언어 속 함의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심을 표하는 흔하디 흔한 은유이자 유다르지 않은 낭만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나는 늘 학생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과 영화에 대해 묻는다. 배우려고 온 사람에 대해 알아야, 가르치는 사람이 효과적인 수업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생들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해마다 상황은 심각해졌다. 반 이상의 학생이 최근 한 달은커녕 삼 개월 안에도 본 영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과제 때문에 읽는 전공서 외에는 책도 읽지 않는다고 말했다. 드라마도 보지 않고, 게임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나마 보는 것은 유튜브 정도인데 그것조차 관심이 없다고 했다. “세상에나…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궁금하지 않아요?”라는 나의 말에 학생들은 궁금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걔 중 최근에 영화 한 편을 봤다고 손든 학생이 말했다. 

"저도 사실 유튜브에서 요약 해석본을 봤어요. 이것도 봤다고 칠 수 있을까요? 교수님?"

고개를 저으며 나는 말했다. 

"아니요, 그리고 왜 그걸 봤다고 칠 수 없는지 우리 한 학기 동안 함께 생각을 해보고 답을 찾을 거예요."

창밖에 벚꽃 망울이 움트기 시작한 때쯤, 우리들은 강의실에서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날짜만 지정하고, 일부러 영화의 사전 정보는 알려주지 않았다. 한 달 정도는 이 영화로 수업이 진행될 예정이고 퀴즈와 활동도 있을 것이니 그날만큼은 결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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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4월이야기>(이와이 슌지, 2000) 스틸컷 ⓒ네이버 영화



 

내가 선정한 영화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2000)였다. 벚꽃이 아름다운 봄의 도쿄의 풍경을 배경 삼아 진행되는 개인의 짝사랑이 내면의 성장으로 귀결되는 영화다. 런닝 타임은 약 60분인데, 1시간 15분의 수업 시간을 딱 한 번만 시청에 할애하면 됐다. 심지어 영화의 주인공 우즈키가 막 대학에 입학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유학 온 대학생이라는 설정은 봄 학기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로 적격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매년 봄마다 보고 또 봤다. 그럼에도 영화의 사전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것은, 학생들이 영화를 보는 시간만큼은 이미 공개된 정보 안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기를 원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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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4월이야기>(이와이 슌지, 2000) 스틸컷 ⓒ네이버 영화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를 그것도 대학 강의실에서 본다는 걸 학생들은 생경히 여겼다. 나는 한 사람 앞에 한 장씩 미리 준비한 페이퍼를 나눠줬다. 페이퍼에는 평론을 구성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질문들을 적어 놓았다. 예컨대 이런 식의 질문이었다.


 

 

 

1) 이 영화의 장르를 골라보세요 (로맨스/드라마/추리/공포/성장/액션 등)

1-1) 그렇게 생각하게 한 장면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미숙해도 괜찮다는 위로를 4월의 '청춘'에 담아

"뭐야? 한마디 말도 안 하더니 글은 이렇게 잘 적어놨잖아요."

글자로 빼곡한 페이퍼를 받아 들고 한 달여간 토론 수업을 했다. 수업은 걷어온 페이퍼를 바탕으로 구성한 질문을 내가 학생들에게 던지고, 학생들은 페이퍼를 기반으로 대답하는 방식을 활용해 진행했다. 개강이 있던 3월 초에는 손을 들어 의사를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학생들이 한 달 사이 훌쩍 자라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해석에 어울리는 책을 추천해달라는 학생도 생겼고, 혹시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교수님도 읽어보셨으면 좋겠다며 나에게 책을 추천하는 학생도 있었다. 어떤 학생은 수업 시간이 종료된 후 찾아와 발표 점수에 들어가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아까 수업 때 하고 싶었던 말을 해도 되냐고 묻고, 굳이 시간을 할애해 수업 시간에 던진 질문에 대해 뒤늦은 답변을 하고 가기도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서 아까 왜 말을 안 했어요?"

"부끄러워서요. 사람들이 제 생각이 틀렸다고 할까 봐 걱정됐어요."


나는 대답했다.

"우리 다 같은 영화를 보고 똑같은 질문에 답을 적었는데 모두 다른 내용을 적은 거 알죠? 누구는 <4월 이야기>가 공포 영화라고 했고, 또 다른 학생은 이 영화가 추리 영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정의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고 조금 미숙하더라도 납득을 할 수 있었잖아요. 다른 학생들이 그렇게 말하는 거 들으면서 우리 학생은 틀렸다고 생각했나요?"

"아니요, 그렇게 해석한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학생이 지금 저에게 말한 해석도 대단히 다정하고 멋있었어요. 모두에게 각자의 세계관이 있고, 우리 학생에게도 학생의 세계관이 있는 거니까 이 수업에서만큼은 자신 있게 말하면 좋겠어요. 아무도 틀렸다고 비난하지 않는 시간이 될 거라고 제가 약속 할 수 있습니다. 이유가 부족하면 우리가 같이 찾아줄 겁니다. 미숙해도 괜찮은 시간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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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벚꽃 풍경 ⓒ이지혜

 


 

열린 창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교정에 벚꽃이 

만개했다.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벚꽃권을 쓰겠다는 학생들과 끝까지 쓰지 않겠다는 학생들이었다. 나는 벚꽃권을 쓰기를 권유하는 쪽이었다. 청춘과 낭만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쨌든 그런 경험이 모두에게 공평히 도래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길어봤자 보름일 꽃놀이 기간, 총 4번의 수업 중 한 번 정도는 학생들이 주어진 형식과 규칙을 어기고 시간을 허비하며 강제로 낭만 비슷한 것이라도 체험하는 경험을 가졌으면 했다. 학생들이 나의 강의 시간을 한 시간쯤 낭비하더라도, 내가 교수자인 이상 수업의 질이나 균형은 맞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많은 글을 읽어야 하고, 현명한 결정을 하기 위해선 삶 속에서 많은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오늘 저와의 수업이라는 경험을 선택했군요. 고맙습니다."


벚꽃권을 오늘은, 혹은 끝까지 쓰지 않겠다는 학생들과 나는 몇 편의 평론을 함께 읽었다. 평론이라는 걸 실제로 처음 접한다는 학생들이 많았다. 걔 중에는 "교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추천해 주세요.", "교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평론을 알려주세요."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나는 학생들이 전공수업 외에 다른 인문교양서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결국 평론가 신형철의 평론집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아이들 앞에 꺼냈다.


"여러분 나이 때쯤,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만큼이나 질문하는 걸 어려워할 때부터 짝사랑하듯 좋아하던 평론집이 있는데요. 그 책 속에 있는 글 한 편은 아마 백번도 넘게 읽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중요한 건 보고 또 보는 계속 보는 거예요."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 속 한 부분을 옮기며 이번 글을 마친다.



영화 속에서 엉키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매듭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삶의 한 신비를 시각적 어리둥절함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영화 속에서 흐르는 시간이 하나의 의미로 박제되지 않고 충분한 섬세함으로 생포될 때 그것은 이 세상을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 의미들을 제 안에 품고 있는지를 경이롭게 느끼게 한다. (중략)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또 본다. (본문,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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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형철 평론집 《정확한 사랑의 실험》 ⓒ이지혜




💌 추신: 이 에세이를 언젠가 먼 훗날 학생들 중 한 명쯤은 찾아볼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저에게 배웠던 강의 시간 중 한 찰나라도 여러분이 영화적 경험을 했기를 바랍니다. 타인의 요약으로 얻어낸 것과 직접 체득한 경험의 질적 차이를 깨닫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경험에서만 얻을 수 있는 청춘의 낭만을 최대한 동등하게 가져갔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2024년 봄의 한 장면이 긍정의 순간으로 남았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전히 좋아하고 계속 좋아할 신형철의 글 일부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여러분의 없음을 제가 받았고, 저의 없음을 여러분에게 주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결여를 견뎠던 순간 자체를 저는 '청춘'이라고 칭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청춘이 무척 소중합니다. 이 말의 뜻을 한 사람이라도 알아채 준다면, 덕분에 저는 무척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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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영화평론가 / 문화평론가

 

영화전문매체 〈코아르Coar〉(클릭하면 이동)에 영화 평론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국내판) 웹진〈문화톡톡〉(클릭하면 이동)에 문화 평론을 매월 고정 연재하고 있다.

2023년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계열 박사과정생 연구지원금 수혜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소속으로 한국문화콘텐츠 연구자로도 활동 중이다. 

 

▷문화전문매거진 《쿨투라》 제 16회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2022)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전북부문 심사위원(2023)

서울역사영화제 프로그래머(집행위원)(2024)

 

 leehey@khu.ac.kr

인스타그램@leehey_c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