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불어오는 곳, 함께 읽는 서울책보고
김봉철
독립출판인
얼마 전 황학동 거리를 다녀왔습니다. 거리에는 오래된 골동품들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그 낡은 물건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각각 필요와 쓸모를 읽어내었고 또 누군가는 추억을 읽어내었을 것입니다. 멈춰 서서 잠시 들여다보고 눈길을 주는 동안 물건들에게는 짧게나마 새로운 추억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자리를 펴고 오래 된 책들을 파는 분도 계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올 때 마다 책장은 넘어가고는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바람 이외에는 책장을 넘기려는 이는 없는 듯 보였습니다. 저는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책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선뜻 그 앞으로 다가서지 못한 채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언젠가는 길바닥이 아닌 책장에 꽂혀있었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획 회의를 하고 작가에게 원고를 청탁하여 표지의 디자인을 정하고 세상에서 널리 읽히기를 바라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필요도 쓸모도 읽혀지지 못한 채로 책들은 거리 위 돗자리 위에서 쓸쓸한 추억만 간신히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새는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포크레인이 파낸 흙을 덤프트럭은 싣고 어디론가로 가져가게 됩니다. 땅을 파다 유물이 나오면 작업을 중단하고 문화재청에서 나와 발굴을 시작하게 됩니다. 간혹 문화재청에서 관리하지 않을법한 유물들을 제가 발굴해 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살던 집들을 허문 땅 아래에는 그 시간을 살아왔던 사람들의 추억들이 묻혀있습니다. 글씨도 알아볼 수 없는 신문지, 용도를 알 수 없는 파이프. 얼마 전에는 흙이 묻었지만 제법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를 주운 적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보물을 찾은 것 마냥 신이 나고 기쁩니다. 겉면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 무슨 노래가 녹음되어 있는지, 혹은 누군가의 사랑 고백이라도 담겨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주머니에 넣고 쉬는 시간 동안 테이프에 볼펜을 넣고 빙글빙글 돌려 맨 앞으로 감아보았습니다. 무슨 말들이 담겨 있을지, 어떤 노래가 들어 있을지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어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저 그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들이 언젠가는 다시 시작되어 누군가에게는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고 잉어가 헤엄치며 백로가 날아오기도 한다는 청계천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여가를 즐깁니다. 지금처럼 사람들의 산책로가 되기 이전, 청계천 위로는 도로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도시 개발의 한 일환으로 흐르는 강물을 막고 그 위로 차가 다니도록 길을 만들었습니다. 흘러야 할 강물을 흐르지 못하게 막아두어 다시 흐를 수 있게 하려는 청계천 복원공사가 한창이던 2000년도 초반, 버스는 공사 중이던 도로를 쉽게 지나가지 못해 한참을 서있고는 했습니다. 북적이는 동대문 인근의 상인들을 멈춰있다시피 한 버스 안에 앉아 바라보다 보면 거리 한 쪽에 늘어서 있는 헌책방들에 이끌려 내려 읽다 가기 일쑤였습니다. 장르도 출간 연도도 다른 다양한 책들을 읽어나가는 일들은 마치 보물 찾기와도 같은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건물을 지을 땅을 정돈할 때에 사람들은 좋은 흙과 나쁜 흙을 구분합니다. 좋은 흙은 단단하고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흙이고 나쁜 흙은 쉽게 바스러지며 단단하게 집결되지 않는 흙입니다. 나쁜 흙을 퍼 나가고 좋은 흙을 쌓습니다만 저는 이 광경을 볼 때마다 흙에 정말 좋고 나쁨이 있는 건지 의문이 들고는 합니다. 모든 것은 사실 필요와 쓸모의 문제일 것입니다. 저의 마음은 항상 단단하게 집결되지 아니하고 쉽게 바스러지고는 합니다만 이런 저의 마음은 과연 나쁜 것일까요? 분명 이러한 저의 마음으로 써 내려 간 글도 누군가에는 제법 읽힐만한 글일 것입니다.
독립출판을 하고 출판사에서 책을 몇 권 내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마음이 무너져간 자리를 힘겹게 적어낸 자리를 사람들은 읽었습니다. 좋고 나쁨은 간혹 필요와 쓸모에 의해 구분되고는 합니다. 도심 한 가운데 흐르는 물을 쓸모 없다 하여 콘크리트로 뒤덮고 다시 도시에는 자연이 필요하다고 하여 물을 흐르게 합니다. 소위 베스트셀러라고 불리는 책들은 판형을 바꾸고 세련된 표지로 개정판을 만들고는 합니다. 저는 이러한 일들을 볼 때마다 주워두었던 카세트 테이프에 연필을 꽂아 앞뒤로 돌려보고는 합니다. 언젠가는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누군가에는 분명 쓰임이 있을지 모릅니다. 좋고 나쁨의 구분은 없습니다. 서울 잠실나루 옆에는 여러 헌책방들이 모여있는 서울책보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구경하고 멋진 공간에서 사진을 찍거나 북토크를 듣기도 합니다. 좋고 나쁨의 구분 없이 필요와 쓸모와 무관하게 그저 읽히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책들 속에서 그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들이 언젠가는 다시 시작되어 누군가에게는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봉철
독립출판인
독립출판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글이 아닌 비주얼로 승부하는 중.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 『이면의 이면』, 『봉철비전 - 독립출판 가이드북』,
『마음에도 파쓰를 붙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등을 제작하였으며,
『숨고싶은 사람들을 위하여(2020, 웨일북)』, 『작은 나의 책(2020, 수오서재)』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