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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7

SPECIAL

[오은의 오늘의 시] 헌책_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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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생일


          오은

 

 

흔히 새 책이 축하받지만

헌책에도 생일이 있어


헌책방이나 도서관이 처음 문을 연 날

그날도 생일이지

없던 것이 생겨났으니까


헌책방에 가면

문득 책의 생일이 궁금해져

언제 태어났을까

어디에서 모험이 시작됐을까

지금 몇 살이나 됐을까

충분히 사랑받고 자랐을까


그럴 때면 

책의 판권 면을 펼쳐

호적 등본 같은 거야

너는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다

생년월일과 본적을 알려주는 거지


헌책방을 둘러보다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라는 책을 골랐어

어른이 아니고 어린이가 된다니?

나의 꿈은 그저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이었는데

어린이가 된다면…… 그게 더 좋겠는데?


너는 2020년 12월 21일에 파주에서 태어났구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살을 더 먹었겠구나

네가 빛을 볼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의 이름들을 봐

혼자 이전에 여럿이 있었잖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생명은 없지


지금 네 살이지만

네 이름처럼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너는 언젠가 다시 어린이가 될 것 같다

어린이는 사랑받아야 마땅하니까


책도 이름을 바꾸기도 해

사람이 개명하는 것처럼

더 나은 삶을 향해 재출발하는 거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기도 해

어떤 책은 몇십만 명과 만났다고,

특별하다고 다시 태어나기도 해


특별하지 않은 책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특별함은 눈길에서 싹트는 것인데


그런데 그거 아니?

헌책도 다시 태어난다?


새로 찍을 때마다?

아니, 거듭 펼칠 때마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아니, 행간을 읽을 때마다


공간도 마찬가지야

방문할 때마다

그 안에 마음 한 자락을 걸칠 때마다

낯익은 책장에서 낯선 책을 발견할 때마다


새로 태어나

어린이가 돼


책에 얼굴을 묻고 속삭인다

생일 축하해

잘 태어났다

고마워


헌책방에서는 매일 특별한 감정이 탄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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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 ©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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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시인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