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ol. 37

SPECIAL

[소설가 박진규의 책 보고 간다] 70대 노작가가 <서울책보고>에서 쓴 소설

박생강.jpg

 

소설가 박생강의 책 보고 간다

70대 노작가의 <서울책보고>에서 쓴 소설

 

박생강

소설가, 수사전문지 《수사연구》 기자


 

Emotion Icon<소설가 박생강의 책 보고 간다>는 책과 문화, 그리고 일상을 소재로 한 에세이가 담긴 코너입니다.

 

 

 

 

*

 

 

 

 

이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내가 서울책보고에서 체험한 경험을 최대한 솔직하게 쓰는 편이 제일 좋을 것 같다. 꾸밈없이 남김없이. 나는 지금 <서울책보고> 개관 35주년 기념 에세이를 청탁받아 쓰고 있다. 서울 시내 헌책방 서가를 그대로 옮겨놓은 <서울책보고>가 탄생한 것은 2019년이다. 당시 청계천의 유명한 헌책방거리의 헌책방을 포함해 여러 지역의 헌책방 서가를 거대한 공간에 옮겨놓은 모습이었다. 서울 헌책방의 역사를 옮겨놓은 박물관이자, 실제 헌책을 파는 서점이자, 시민들이 마음 편히 드나드는 도서관이자, 책으로 둘러싸인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놀이터의 탄생이었다. 물론 겉모습은 헌책방이나 도서관의 느낌은 아니었다. 서울 한강변에 불시착한 거대 비행접시와 오히려 닮아 있었다. 

나는 2023년 <서울책보고>에서 1년간 독서모임인 금요북클럽을 진행하면서 이 독특한 공간과 인연을 맺었다. 지금은 2054년, 서울책보고가 개관한 지 어느새 35주년의 시간이 흘렀다. 서울책보고는 몇 번의 보수공사 이후에도 외형적으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jpg

▶ 서울책보고 헌책방 서가의 세계문학전집 © 박생강

 

 

일단 사람들이 서울책보고 하면 떠오르는 서가 통로에 놓인 아치형의 높은 조형물은 아직 건재하시다. 맨 처음 서울책보고에 들어왔을 때 원형철제서가를 통과해 걷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뭔가 이 세상의 거대한 지식들을 집어삼킨 거대한 책벌레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조형물 양쪽으로 서울책보고의 허파라 할 수 있는 거대한 헌책의 서가가 있다. 서울책보고를 처음 방문했을 때 서가에서 어린 시절 즐겨봤던 <챔프>, <댕기> 같은 만화잡지나 백과사전, 세계문학전집 등을 발견하고 행복해졌다. 학창 시절 책벌레의 추억이 고스란히 이곳으로 이식된 것 같았으니까. 

 

 

2.jpg

▶ 서울책보고 헌책방 서가에서 찾아낸 포켓가요 책자 © 박생강

 

 

그 후 서울책보고를 방문할 때마다 그 서가를 탐색하는 게 나의 취미였다. 도서관처럼 차례대로 정렬된 서가가 아니라 헌책방마다 책을 꽂아둔 것이어서 어디에 어떤 책이 있는지 쉽게 알 수 없었다. 편리한 방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그게 어수선하기보다 뭔가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은 재미가 있어 더 좋았다. 

서울책보고에는 대학시절 즐겨 읽던 90년대 인기 작가들의 책들이 숨어 있었다. 한 헌책방의 서가 고층부에는 그때 당시 출간된 문학계간지들이 꽂혀 있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표지모델인 포켓가요를 보고 랩 따라 하던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면서 이 작은 포켓가요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때가 있었다. 서울책보고 서가에는 내 등단작 《수상한 식모들》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도 꽂혀 있다고는 했다. 나는 다른 책들을 찾는 재미에 빠져 내 책은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봐도 책이나 나나 서로 쑥스러울 것 같기도 했고. 

 

 

3.jpg

▶ 서울책보고 기증서가에서 발견한 교정 잡지 © 박생강


또 언젠가 헌책방 서가가 아닌 기증서가에서 형사 정책 연구와 교도소 교정 잡지를 발견하고 진짜 보물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수사전문지 《수사연구》에서 오랜 세월 일했던 나를 위한 안성맞춤의 잡지 목록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도 서울책보고 30주년 행사에서 내가 보관해 온 《수사연구》 잡지의 일부를 기증하기도 했다. 

 

 

4.jpg

▶ 서울책보고 기증서가에서 발견한 형사정책연구 © 박생강

 

 

이렇듯 2023년은 서울책보고와 함께였고, 서울책보고 안을 돌아다니면 80년대와 90년대와 2천년대를 살아온 헌책의 시간이 내 인생과 함께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거대한 서울책보고가 나의 책보고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5.jpg

▶ 서울책보고 배경의 단편 <몽신체>를 수록한 청소년 앤솔로지 《몸스터》 © 박생강


 

청소년소설 앤솔로지 몸은 몬스터 《몸스터》에 수록한 단편 <몽신체>의 아이디어를 얻은 곳도 서울책보고다. <몽신체>는 내 몸과 붙어있는 몸이지만 꿈에서만 나타나는 몽신체란 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서울책보고 기증서가에는 육포책이라는 비법서가 있고, 몽신체가 활동하는 꿈속에서는 또 다른 꿈의 책보고가 있다. 꿈의 책보고는 서울책보고와 닮아 있지만 한 사람이 읽어온 헌책과 그가 살아온 인생이 여러 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있는 서가로 이루어진 곳이다.


<몽신체>를 출간한 이후 서울책보고와 함께 <내 인생의 책보고>라는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신청자와 함께 그가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 그가 살아온 인생을 담은 책들, 앞으로 읽고 싶은 미래의 책들로 구성된 가상의 책보고를 만들어주는 프로젝트였다. 책을 좋아하고, 좋아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스케치북에 내 인생의 책보고를 다양한 형태로 그려온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스쳐 간다. 

2034년에는 VR을 통해 신청자가 직접 <내 인생의 책보고>를 걸어보고 내 인생의 헌책과, 내 인생의 책, 내 미래의 책을 읽는 가상 체험 코너가 만들어졌다. VR 안경을 쓰고 서울책보고 카페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아치형의 통로를 지나 내 인생의 책보고로 들어갈 수 있다. 비행접시를 닮은 외형의 책보고와 어울리는 미래적인 책 놀이 방식이었다. 


개관35주년 <서울책보고>는 다행히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한강변의 풍경과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리고 헌책 역시 여전히 서울책보고 서가의 그 자리에 있다. 넘겨진 지 오래인 그 페이지를 다시 넘겨줄 독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책이 주는 위안과 포옹과 즐거움과 지혜의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이곳을 찾는다. 헌책과의 추억여행은 언뜻 낡은 감성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언제나 이 헌책방의 서가를 거닐 때마다 마음에서 새싹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서울책보고 35주년 축하합니다. 

2024년에, 2054년에도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소설가 박생강. 


 

 

 

 

 

 

 

 

 

      프로필 사진 변경.png 

박생강

소설가, 수사전문지 《수사연구》 기자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5년 《수상한 식모들》로 제11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으면 등단했으며

 2017년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로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에어비앤비의 청소부》, 《나의 아메리카 생존기》, 《빙고선비》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