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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7

SPECIAL

[밑줄의 일부] 공간이라는 인연, 책에 담긴 사연 ‘서울책보고’와 피천득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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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라는 인연, 책에 담긴 사연 ‘서울책보고’와 피천득의 인연  
 

이지혜

영화평론가, 문화평론가
 
 

Emotion Icon<밑줄의 일부>는 영화와 드라마, 문화현상의 인문학적 고찰에 대한 에세이가 담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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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전미 비평가 협회 작품상(2024)을 수상했고, 현재 국내 상영 중이기도 한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셀린 송)는 '인연'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주인공 '노라(그레타 리)'는 한국에서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하는 과정에서, 시차가 맞지 않아 연락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유년 시절의 친구 '해성(유태오)'과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그리고 유대계 미국인인 '아서(존 마가로)'를 만나 결혼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서에게 한국에는 '인연'이라는 단어가 있으며, 특히 부부의 연은 '8000겁'의 인연이 쌓여야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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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스트 라이브즈>(셀린 송) 공식 포스터 ⓒ네이버

 

 

사전적 의미에서 '인연'이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나타내는 명사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말하는 '인연'은 일반적 관계 명사로서의 역할에서 한발 더 나아가 불교의 윤회사상, 전생과 환생의 개념을 덧댄 것이다. 즉, 이 영화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단 하나를 선택하기 위한 모든 과정에는 전생부터 걸쳐온 인연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금 내 옆에 있는 모든 것들은 거듭된 환생 속에서 스치고 경험하며 얻어낸 결과물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담백한 이별' 또한 다음의 생으로 가기 위한 인연이라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한편 '인연'이라는 단어를 보면 당연히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피천득(1910-2007)이다. 그의 수필 《인연》의 첫 장 일부는 아래와 같다.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든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인연을 통해 피천득은 성심 여자 대학에 다니던 아사코와 세 번에 걸쳤던 만남에 대해 고백한다. 그리고 한때는 '인연'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관계, 혹은 계속 이어졌으면 좋았을 관계에 대한 '기억'을 '사연'이라고 통칭해 화두에 올린다. 본디 사연이란 "일의 앞뒤 사정과 까닭"을 말하지만, 피천득이 말한 '인연'과 '사연'이라는 단어 사이 행간에는 만났지만 엇갈렸고, 그래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사코'와의 만남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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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책보고 외관 ⓒ이지혜

 

 

그런데 '인연'이 비단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적용될까?


마시던 커피를 정리하고, 통유리창 사이에 배치된 바 테이블에 올려뒀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둔 후 서울책보고를 돌아 나오면서, 얼마 전 봤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와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떠올랐다. 알다시피 서울책보고는 서울시가 오래된 책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고 헌책의 가치를 보존하며 많은 사람과 다시 공유하고자 만든 도서관형 공공문화공간이다. 따라서 도서관의 모양새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마음껏 책을 향유하고 즐길 수 있도록 북카페를 포함해 참여형 행사들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글을 청탁 받기 이전까지 서울책보고에 와본 적은 없었다. 몸담은 직업이 다니고, 보고, 읽고서, 쓰고 말하는 것임에도 그랬다. 굳이 말하자면 그간은 서울책보고라는 공간과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웹진에 고정 연재를 시작하고 나서야, 이 공간에 한 번쯤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혀 모르는 공간이 기획하는 일을 장기적으로 담당한다는 것이 좀 겸연쩍었다. 부랴부랴 일정을 정리하고 적당한 날짜를 헤아렸다. 때마침 서울책보고가 개관 5주년을 맞이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강의를 끝낸 후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강을 하나 건너고서야 잠실나루역에 내렸다. 몇 분 걷지도 않았는데 가로 막대가 누운 것 마냥 긴 형태의 건물이 산책로 사이로 드러났다. 장소를 기획할 당시 '책벌레'라는 단어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벌레처럼 구불구불하고 긴 내부 공간을 구성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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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책보고 내부 ⓒ이지혜



유리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뚜벅뚜벅 걸어서 길고 넓은 공간을 되는대로 걷는 사이, 헌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말끔하게 관리된 책들이 곳곳에 진열되거나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히 '헌책'이라고 말하기엔 미안할 정도였다. 단지 세월을 머금은 책들이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소중한 사연을 품었거나, 혹은 한 번도 읽히지 않은 채 시간을 지나온 책들이 고스란히 모여 새 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진열된 책에 도서 기호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도서관은 한국 십진분류법을 기준으로 책을 분류한다. 책의 주제를 큰 갈래에서 9가지(100~900)로 나누고, 주제에 들어가지 않는 신분야는 000으로 분류한다.


나는 100번대(철학)와 800번대(문학) 사이를 오가며 때때로 300번(사회과학)과 600번(예술)을 오가는 도서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가를 위해 책을 고르거나, 읽어야 할 때는 취향이 아니거나 불필요한 책 사이에서 방황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도서 기호를 기준으로 책을 찾았다. 따라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짐짓 당황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각 책장마다 현판 같은 게시문이 붙어있었다. 그건 각 책장의 도서를 책임진 책방에 대한 소개 글이었다. 서울에 위치한 헌책방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국 각지의 헌책방이 '서울책보고'에 모여있었다. 서점 주인이 하나하나 골라 보냈을 책들의 책등을 톺아보았다. 나름의 규칙도 있었다. 서점별로 분류된 책들은 다시 출판사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간의 독서 습관과 규칙이 송두리째 무너진 상황에서 나는 기묘한 재미를 느꼈다. 도서 검색대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각 서점의 이야기를 읽으며, 오래된 책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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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책보고 내부 ⓒ이지혜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노라'는 36살이 되어서야 12살에 헤어졌던 '해성'을 잠시 다시 만난다. 이때 노라가 해성을 향해 뱉는 말은 그저 단순한 감탄사나 마찬가지인 "와, 너다."이다. 나도 그랬다. 책장 사이를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정신없이 방황하던 중이었다. 대여점이 호황이었던 세기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빌려봤던 만화잡지와 부모님이 읽던 영화지를 이십여 년 만에 개관 5주년을 맞이한 서울책보고에서 다시 만났다. 지금-여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거짓말 같은 순간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얼른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너무 호들갑을 떨진 않았나 걱정하며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얼른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라와 해성의 만남을, "와, 너다"를 떠올렸다. 생경한 반가움에 발을 동동 구르며 책 앞에 서 있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2000년, 1999년…1996년. 숫자들을 헤아리는 동안 시간이 거꾸로 흘러갔다. 사춘기가 오기 시작한 초등학생 꼬맹이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깨금발을 하고, 가장 좋아했던 에피소드가 실려있던 잡지를 꺼냈다. 용돈을 모아 책을 샀다. 살 수 없을 땐 책이 발간되는 날을 헤아려, 입고되는 날을 물어보고 대여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간발의 차로 누군가 책을 빌려 가면 다시 일주일을 기다렸고, 또 일주일을 기다려 읽고 다음 책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어떤 시절에는 제일 좋아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의 나는 그걸 분명히 좋아했었다. 책장을 넘겨보는 사이 한 장 한 장을 아끼며 읽었던 모든 찰나가 사진처럼 떠올랐다. 너무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장면은 따라 그리면서 마음을 달랬고, 친구와 나눠보며 우정을 나눴던 순간들이 과거에서 순식간에 길어 올려졌다.


수필 《인연의 말미에서 피천득은 말한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나는 아주 작은 장난을 쳤다. 종이에 메시지 하나를 써 끼워 넣고 책을 덮었다. 무엇을 써 놓았는지는 밝힐 수 없다. 지금 내 책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건 과거의 내 책이었을 수도 있는 책이었다. 다시 낑낑거리며 제자리에 책을 꽂았다. 그렇게 그 책을 사 오길 포기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속담이 있다. 인연설에 따르면 옷깃이 스치는 인연은 1000겁의 생을 반복해야만 맺을 수 있다. 하루 간 길을 동행하는 인연은 2000겁, 하룻밤을 묵는 인연은 3000겁, 노라의 말처럼 부부의 연은 8000겁이다. 형제로 만나는 것은 9000겁이고, 부모와 스승의 연은 1만 겁의 연을 맺어야 한다. 그런데 겁은 천지가 한 번 개벽하고 다음 개벽이 시작될 때까지의 시간을 뜻한다. 기실 겁은 아주 큰 숫자의 단위다. 


그렇다면 내가 읽었던 책의 면면이, 다른 사람의 손에 스치게 되어 사연을 만드는 건 몇 겁의 인연일까? 도저히 가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번에 들렀을 땐 그 책이 제자리에 없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왕이면 내가 모르는 아주 먼 곳에 가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사연이, 인연이 되기를 바랐다. 이제부터 나는 자주, 서울책보고에 들러 그 책의 안부와 행방을 찾게 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프로필 섬네일.jpg

 

이지혜

영화평론가 / 문화평론가

 

영화전문매체 〈코아르Coar〉(클릭하면 이동)에 영화 평론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국내판) 웹진〈문화톡톡〉(클릭하면 이동)에 문화 평론을 매월 고정 연재하고 있다.

2023년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계열 박사과정생 연구지원금 수혜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소속으로 한국문화콘텐츠 연구자로도 활동 중이다. 

 

▷문화전문매거진 《쿨투라》 제 16회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2022)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전북부문 심사위원(2023)

서울역사영화제 프로그래머(집행위원)(2024)

 

 leehey@khu.ac.kr

인스타그램@leehey_c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