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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7

BOOK&LIFE

[SIDE B] 쓸데없는 놀이의 쓸모

고선영.JPG

 

감정의 파도타기, 감정디자인

2. 쓸데없는 놀이의 쓸모

 

고선영

작가


 

Emotion Icon<작가 고선영의 감정디자인 : 감정의 파도타기>

감정의 파도를 맞을 때 살아남는 법: 먼저 물에 뛰어들어야 한다. 괜히 덜 맞으려고 요령을 부려봐야 소용없다. 

적극적으로 물속으로 들어가 보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으면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할 수 있다!

 

 

 

 

**

 

 

 

 

 길을 걷다가 문득 어떤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방금 잠에서 깨었다. 이 장면이 떠올라 나는 손을 움직여 머리에 사진처럼 찍힌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을 한참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몇 시에 눈을 떴을까? 작은 원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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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 같은 토요일 ⓒ고선영

 

 

 그녀가 내 맘에 들어온 후에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햇볕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정오에 일어나기도 했고, 천둥 번개와 쏟아지는 빗소리에 깨어나기도 했다. 때로는 악몽에 식은땀에 젖은 채로 몸을 일으키기도 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스탠드 옆에 놓인 책이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우리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매일 매일은 아니어도 종종 생각이 났다. 꼭 내가 알고 지냈던 것처럼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녀는 나처럼 크루아상을 좋아한다. 커피도 라테다. 진한 라테와 고소한 크루아상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고개를 들고 천천히 카페의 하얀 벽을 쳐다본다. 몇 개의 화분만 심플하게 놓여있다. 그때 문득 Gilbert O'Sullivan의 ‘Alone Again’이 흘러나온다. 오후의 햇빛은 카페 원탁 위 산세베리아에 무늬를 그려준다. 좋다. 

조금 멀찌감치 떨어진 몬스테라는 에어컨 바람에 흔들거린다. 

자, 이제 어디를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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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 같은 토요일 ⓒ고선영

 

 

 두 개의 장면을 그리고 그녀가 더 자주 떠올랐다. 뭘 하고 있을지? 퇴근을 했는지? 저녁은 먹었을지 계속 아는 사람인 것 마냥 불쑥불쑥 궁금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 대해 물을 곳이 없었다. 궁금해질 때마다 다른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도 카페 주인에게 잼이 있는지 물었을 테고, 카페 주인은 카야 잼 밖에는 없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머리는 어깨까지 늘어진다. 이맘쯤 되니 이 여자는 내 의식을 파고들어 계속 자신을 어필할 모양이다.


 카페에서 나왔는데 딱히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늘 걷던 공원으로 발길이 닿았다. 아직은 오후니,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모두 덥다고 실내에 있을 것이다. 천천히 느릿느릿 늘 앉던 벤치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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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 같은 토요일 ⓒ고선영

 

 

 벤치로 걸어가는 길에 관엽식물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이게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하고 생각하며 벤치에 앉기 전 한강을 바라본다. 더위가 올라오기 시작해서 금세 인중에 땀이 밴다. 책을 펼쳐두고 한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는 지극히 단순하고 상투적인 감사 인사만을 담고 있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사랑을 생각하다》에 손가락을 넣어 아무 곳이나 펼쳤다. 한 줄을 읽고 펼쳐서 뒤집어 내 옆에 두었다. ‘아... 사랑이 하고 싶은 건가.’

앉아서 멍하니 강만 바라보고 있다. 나도 이번 생에 사랑을 하긴 할 수 있을까?


따릉따릉 소리와 한 줄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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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 같은 토요일 ⓒ고선영

 

 

‘아~ 저기 내 자린데….’

결국 집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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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 같은 토요일 ⓒ고선영

 

 

 오늘도 어김없이 전화를 건다. 점심 한 끼 편의점 음식으로 때우는 것도 지겹다. 

그래도 내 유일한 낙은 퇴근길에 만나는 그 녀석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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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 같은 토요일 ⓒ고선영

 

 

 짬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 누가 알려줘서 그린 건 아니고 그림 스타일도 제각각 다르다. 

위 그림은 몇 년 전에 그리고 상상하며 혼자 놀았던 나의 놀이이다.(이런 놀이는 꽤 여러 개다) 여자와 남자는 사랑에 빠진다. 코로나가 심한 2022년에 그려서 그림 속에 깨알같이 마스크가 있다. 너무 심심했던 나머지 나는 상상 속에서라도 사랑을 해야 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이름과 나이, 성격, 살아온 내력까지 하나하나 상상해 보았다. 다 합하면 15장의 그림이다. 앞뒤로 이야기를 만들어 혼자 놀았다. ‘나무늘보 같은 토요일’이라는 제목도 붙였다. 여자의 이름이 정해졌다가 어느 순간 나와 하나가 되기도 했다. 열 개가 넘는 이야기로 쓰기도 했다. 이야기는 저마다 다르게 흘러가고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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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 같은 토요일 ⓒ고선영



 우리는 하루 내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외부에 소비하고 지낸다. 그래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아껴줄 여력이 없다. 그런 내가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도, 운전을 좋아하는 이유도 같다. ‘에너지 절전 모드’. 표정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타인에게 빼앗기는 에너지가 없다. 그러니까 얼굴 근육에 피로감이 없다. 이 그림을 그리면서 피곤함이 전혀 없었다. 이건 누가 시킨 일이 아니니까 더욱 그렇다. 

 하늘 높은 곳에 두둥실 떠올라 나무늘보 같이 늘어지게 자는 상상을 했다. 이후 일어나 느리게 느리게 그리고 엽서 책으로 묶었다. (거의 작업이 끝났다) 흑백으로 그렸지만 내 상상 필터를 통과하면 바로 형형색색의 세상이다. 눈이 부실 정도다. 이런 놀이를 할 때 에너지가 충전된다. ‘에너지 절전 모드’이면서 소위 ‘쓸데없는’ 놀이다. 이런 ‘무쓸모’ 한 놀이가 우리들 모두에게는 필요하다. 어쩌면 ‘무쓸모’한 짓을 해도 주변에서 손가락질 하지 않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밝히자면 처음부터 이런 실력은 아니었고 자유롭게 그린 지는 햇수로 10년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쓸데없는 짓에 나는 ‘창조적인 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나의 경우는 그림과 글이었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좋다. 창조적인 놀이를 하다 보면 우리는 ‘나’ 스스로의 주권을 회복한다. 왜냐하면 주변인들은 나의 쓸데없는 짓, 창조적인 놀이를 한심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관심이 없기도 하다. 남들이 한심하게 보는데 내가 나를 그들과 같이 손가락질 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까 남들의 비난 내지는 조롱에도 끄떡 하지 않는 뚝심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을 ‘나라는 사람의 삶의 핸들을 스스로가 쥘 수 있게 된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쓸데없는 것을 하자!

내가 좋은 것을 하자!

남들이 코웃음을 칠 때 그걸 견뎌보자!

그러면 당신은 점점 더 마음의 균형을 얻게 될 것이다.



 ‘감정디자인’의 핵심 도구는 두 가지다. 하나는 ‘상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아 인식’이다. 나는 상상을 자유롭게 하고, 의도적으로도 한다. 현실이 고단할 때도 하고 미운 사람이 있을 때도 한다. ‘톰과 제리’처럼 신나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상을 쓰다가 굳어버린 풀처럼 생각한다. 아니면 거창하고 특이한 사람만의 전유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상은 단순하다. 불이 꺼진 방에 불이 켜지는 것을 떠올려도 상상이고, 베인 손가락이 아물기를 기다리는 것도 상상이다. 사람들이 책을 잘 안 읽다가 독서에 맛을 들이게 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상상이다. 지금도 당신의 머릿속에서 현재 진행 중이다. 느슨하고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피식피식 웃는 당신을 지금 상상해 본다.



'당신은 당신의 쓸데없는 짓을 참아주는가?'

'당신은 창조적인 놀이를 하는가?'


 

 

p.s 선물 같은 '서울책보고', 5주년을 축하합니다. 쓸데없이 자주 놀러 오세요! 

 

 

 

 

 

 

 

 

 

섬네일 고선영 프로필.jpg 

고선영

작가

 

마음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감정도 디자인이 될까요?》, 애정결핍》, 엄마를 통해 나를 본다를 썼습니다.


서울에서 악어책방을 운영합니다.

 

sunyoungkoh@gmail.com

인스타그램 @abl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