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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7

BOOK&LIFE

[SIDE A] 헌책의 가치를 전하는 책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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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의 가치를 전하는 책보고



최지애

소설가

 

 


 

 

누군가 먼저 읽은 책은 헌책이다. 동시에 사람의 가슴을 달군 책은 고전이면서 고서이다. 누군가를 거쳐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이어지는 책들이 모여 있는, 서울책보고가 개관 5주년을 맞았다. 


  인류 문명을 발전시킨 수많은 사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다. 여기서 ‘만들다’의 사전적인 의미는 기술과 힘을 들여 목적하는 사물을 이룬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책을 ‘만들다’라고도 하지만 때때로 혹은 더 자연스럽게 다른 수식어를 떠올리는데, ‘내다’ 혹은 ‘펴내다’가 그것이다. ‘내다’라는 말은 길, 통로, 창문 따위를 만든다는 뜻을, ‘펴내다’라는 동사는 개킨 것을 넓게 하여 내놓거나 널리 퍼뜨린다는 뜻을 가졌다. 그러니 말을 덧붙여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수식어의 역할에 충실히 생각해 보면 길, 통로, 창문 따위를 만들어 그 안에 담긴 무언가를 내놓거나 널리 퍼뜨리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책이 인간이 만든 문화 안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가지는 필연적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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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책보고의 초판·창간 팝업스토어, 희귀한 책이 가득하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널리 퍼뜨려 새로운 길을 내는 것. 그것이 이니, 어려서부터 들었던 책 속에 길이 있다거나 책을 읽어야 성공한다는 말은 비록 상투적일지는 몰라도 거짓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광복과 함께 다른 희망을 품은 사람들로 책 수요가 폭증했다. 1945년 45곳 남짓하던 서점이 1948년 792곳으로 늘어났다. 그런가 하면 6·25전쟁이 나면서 도시는 무너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새로운 꿈을 꾸었고, 전쟁이 끝난 1960년대 청계천변에 있는 가건물에는 헌책방이 생겼다. 청계천헌책방거리에는 1970년대만 하더라도 200개가 넘는 책방이 있었다.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었다. 신학기가 되면 교과서나 참고서를 사려는 학생이나 학부모가 찾았고, 주말이면 대학생들이 소설이나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책에 관한 열정은 뜨거웠고, 그것이 사람에 대한 기대 혹은 삶에 대한 희망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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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책보고에서 판매했었던 <현대문학 창간호>와 <문학사상>

(<문학사상> 2016년 12월호는 화정책방2 서가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문인을 꿈꾸는 사람들도 청계천헌책방거리에서 책을 찾아 길을 잃었다. 시인 신경림 선생은 책더미 속에서 백석 시인의 《사슴》을 발견했고, 소설가 전상국 선생은 이육사의 《육사시집》과 유치환의 《생명의 서》를 어렵게 구했다고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충북 충주의 작은 마을 노은면이 고향인 함민복 시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는데, 기숙사 생활이 단조로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했다고 한다.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시인은 용돈을 아껴 한 달에 한 번 있는 외출 날이 되면 청계천헌책방거리에 갔다. 책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고, 돌아오는 길에는 3,000원 정도 하는 <문학사상>, <현대문학>, <한국문학> 같은 문학지가 손에 들려 있었다. 한 달 정도 탐독하고는 다시 청계천헌책방거리로 나가 새로 나온 문학지를 사 읽었다는 것. 하루는 문학지에서 우연히 같은 반 친구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 친구와 친해져 고등학교 내내 문학 이야기를 하며 꿈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 시절을 풍미하고, 한 사람을 풍요하게 했던 헌책방은 200개 넘었지만 지금 10여 곳만 남아 청계천헌책방거리의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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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버전으로 출간된 돈키호테


 

  책방거리는 사라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헌책에 대한 기대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 헌책의 위상은 달라졌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가치를 지닌 고서는 여전히 애서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진본, 귀중본, 희귀본 등이 그것이다. 양서가들은 많은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러한 책을 꼭 사고 싶어 한다. 일례로 고전 《돈키호테》는 출간된 지 40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수많은 버전으로 재출간되고 있다. 그 명성만큼이나 삽화에 참여한 화가들의 면면도 쟁쟁하다. 앙리 마티스, 드니 앙리 폰숑, 다니엘 비에르주, 아돌프 랄로즈, 퀀틴 블레이크, 거스 보파 알베르 뒤보, 월터 크레인, 존 밴더뱅크, 세바스티안 산체스 후안, 샤를 앙투안 쿠아펠, 에버하르트 슐로터, 페르낭 반 함메, 앙리 르마리, 호세 나로, 리에라 로하스, 제라르 가로스테, 르네 드 포, 베르톨드 만, 베르나르 뷔페, 토니 요한노, 자크 투셰, 파블로 피카소 등이 있다. 

  같은 내용을 담더라도 어떤 사람이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책의 가치는 달라진다. 여러 판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책은 1863년 출판사 아셰트리브르에서 출간한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그림이 들어간 판본이다. 귀스타브 도레는 광가외 환상에 사로잡힌 고독한 돈키호테의 모습을 독특하면서 강렬하게 그려냈다. 1965년 마테우에디토르 출판사에서 출간한 《돈키호테》는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삽회 900여 점이 담겨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력을 가진 돈키호테를 꿈을 꾸듯 몽환적인 느낌의 그림이 잘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스페인 작가 겸 영화제작자인 루이스 아코스타 모로가 아트디렉팅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소설 《돈키호테》의 줄거리, 주인공 돈키호테라는 인물에 더해 책에 들어간 삽화와 책이 만들어진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헌책은 낡은 책이 아니라, 구할 수 없는 책이거나 가질 수 없는 책이 되었다.  


  시인 김수영《거대한 뿌리》에서 “(...)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고 썼다. 결국 기억으로 사는 존재가 인간이지 않을까? 헌책은 한 시대를 산 한 사람의 사색이고, 그 사색이 쌓이고 쌓여 우리의 역사가 된다. 누군가의 헌책이 누군가의 새 책이 되는 곳, 그러니 서울책보고가 소중할 수밖에. 개관 이래 지난 5년 동안 약 60만 명의 사람들이 서울책보고를 드나들었다. 약 42만여권의 책이 새로운 주인을 따라나섰다. 단순히 헌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펼쳐지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남겨지는 이야기. 그 시간의 기억과 기록이 담기는 공간. 헌책이, 서울책보고가 하나의 역사가 되는 순간이다. 사람의 손때 묻은 책이 있는 한, 그 책을 둘러싼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계속되는 한, 세상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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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애

소설가, 문화기획자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3년 ‘심훈문학상’을 수상, 2014년 계간 <아시아>에 수상작 《달콤한 픽션》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앤솔러지 《숨어 버린 사람들》, 《마스크 마스크》에 작품을 수록했다.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 2023년 제20회 서라벌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문화기획사 다랑어스토리 대표이며, 동네서점 청맥살롱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