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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6

SPECIAL

[소설가 박진규의 책 보고 간다] 나의 첫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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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생강의 책 보고 간다

나의 첫 상자

 

박생강

소설가, 수사전문지 《수사연구》 기자


 

Emotion Icon<소설가 박생강의 책 보고 간다>는 책과 문화, 그리고 일상을 소재로 한 에세이가 담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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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수저》 나카 간스케 /휴머니스트 © 박생강

 

「나의 서재에는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모아둔 책장 서랍이 있는데 오래전부터 그 안에 작은 상자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코르크 나무판 이음매마다 모란꽃 무늬 색지가 붙어 있는 걸 보면 원래는 외제 가루담배라도 들어 있었으리라. 눈에 뜨이게 아름다운 상자는 아니지만 차분한 색감과 만질 때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 뚜껑을 닫을 때 나는 톡 하는 소리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어서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물건 가운데 하나다. 상자 안에는 별보배조개, 동백나무 열매,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자잘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이한 모양을 한 작은 은 숟가락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나카 간스케 《은수저》도입부


원래 시를 썼던 나카 간스케는 나쓰메 소세키의 제자이자 문하생이었는데, 나쓰메 소세키가 이 소설의 초고를 보고 극찬했다 한다. 사실 은수저는 대단한 스케일의 작품은 아니다. 별다른 큰 사건 없이 유년기 풍경을 차분하게 담아낸 소설이다. 아이를 둘러싼 풍경, 간식과 음식, 아이 옆을 스쳐 간 어른들의 모습, 학교에서의 일상 등이 순수한 감각의 언어로 담겨 있다. 그러면서도 음식, 풍경, 사람들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 때문인지 소설이 화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른의 때가 묻지는 않았으나 아기자기하게 화려한 경지랄까? 그래서인지 은수저》는 일본 내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스터디셀러로 알려져 있고, 천천히 함께 읽는 소설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소설을 알지 못했다가 뒤늦게 읽었는데 마음에 와닿는 부분들이 적지 않았다. 몇몇 장면들은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출판사에서 《은수저》가 포함된 세계문학 시리즈를 소개할 때 아껴먹는 간식처럼 맛있다.

특히 나로서는 주인공과 공감대가 깊은 소설이었다. 나도 어릴 때 병약하게 골골대던 아이였다. 자주 감기에 걸리거나 미열이나 두통, 배앓이를 달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혼자 멍하니 마루에서 생각에 잠기거나 동화책을 읽는 시간들이 더 많았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편식도 심한 편이어서 어떤 음식은 냄새가 또 어떤 것은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스레 이 소설을 읽은 후에는 잊혔던 유년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익숙한 기억 중 하나는 눈을 밟는 감촉 같은 것들이다. 나는 유년기를 떠올리면 눈 밟는 소리가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한다. 뽀드득 소리, 피부에 돋는 소름, 입에서 나오는 입김 같은 것들. 추운 겨울밤 대문 밖으로 나오면 바로 보이던 언덕 위 교회 첨탑을 감싼 크리스마스트리도 생생하다. 우리 집 밤하늘에 크리스마스카드 한 장이 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라고 딱히 설레지는 않지만, 그때 그 시절이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면 뭔가 겨울의 신선한 공기를 마신 듯 행복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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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 시절의 형과 나 © 박생강

 

반면 익숙하지만 까맣게 잊은 기억도 있었다. 첫 컵라면에 대한 기억이 그중 하나였다. 내가 여섯 살 때였나? 80년대 중반의 풍경이다. 방 안에 나와 형과 엄마가 있고 작은 밥상에 삼양 컵라면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이게 뜨거운 물만 부으면 1분 후에 먹을 수 있는 라면이래.”

엄마가 라면 뚜껑을 뜯어 뜨거운 물을 붓고 젓가락을 뚜껑에 올려두었다. 우리 세 사람은 라면이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 먹은 컵라면의 맛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초집중해서 컵라면이 익는 동안 세 사람이 뚫어져라 바라보던 순간은 생생하다. 어른이 된 후 수없이 컵라면을 먹으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던 풍경인데 이 소설을 읽은 후에 기억이 났다. 이 외에도 설탕 가루가 뿌려진 과일 모양 젤리나, 신호등 사탕, 특히 좋아했던 딸기 맛 포미콘, 아이스크림 콘 모양의 초콜릿 등 많은 간식들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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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룡상자는 어디로 갔을까? 날개 달린 지렁이신이 나타나서 가져갔을까? © 박생강

 

그리고 어린 시절 내 책상 서랍 속에도 특별한 상자가 하나 있었다. 붉은 공단 상자인데 금색 걸쇠로 열고 닫을 수 있으며 열 때마다 똑, 소리가 나는 상자였다. 《은수저의 첫 장면처럼 나도 그 상자 안에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넣어둔 기억이 난다. 유리구슬이나 작은 장난감, 대학 때는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사진들도 넣었다. 그 상자에 한자가 흘림체로 쓰여 있었는데, 그 글자 중 두 글자가 토룡이고, 토룡이 무엇을 뜻하지는 한참 후에나 알았다. 내가 어린 시절 볼 때마다 기겁했던 지렁이였다. 그 토룡상자는 내가 여섯 살 때 돌아가신 할머니가 드셨던 지렁이로 만든 영양제 상자였던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1년 전쯤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던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할머니가 내게 주셨거나 나 내가 예쁘다고 달라고 한 것 아니었을까 싶다. 아쉽게도 그 상자가 내 손에 들어온 기억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 글을 쓴 뒤에 그 토룡상자를 찾아보니 어디에도 없었다. 어른이 된 어느 날에 무심히 정리하며 내버렸던 듯하다. 소중한 것이 소중하다는걸, 사소한 물건이 그리워질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던 걸까? 토룡상자는 그렇게 어느 순간 내 곁에서 스르르 사라졌다. 그 상자 안에는 유년의 추억만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 세상과 처음 마주할 때 느끼는 첫 감각의 즐거움들이 담겨있을지도 몰랐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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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생강

소설가, 수사전문지 《수사연구》 기자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5년 《수상한 식모들》로 제11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으면 등단했으며

 2017년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로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에어비앤비의 청소부》, 《나의 아메리카 생존기》, 《빙고선비》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