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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6

BOOK&LIFE

[SIDE B] 당신의 처음에는 원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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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파도타기, 감정디자인

1. 당신의 처음에는 원래가 없었다

 

고선영

작가


 

Emotion Icon<작가 고선영의 감정디자인 : 감정의 파도타기>

감정의 파도를 맞을 때 살아남는 법 : 저항하지 않는다. 몸에 힘을 빼고 파도를 맞다가 힘을 모아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파도 위에 두 팔과 다리를 벌리고 균형을 잡는다. 이제 우리 인생에서 파도타기 할 시간이다!

 

 

 

 

 

 

     ‘처음’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일곱 살 무렵이었다. 숨바꼭질을 하다 친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골목을 헤매다 사방이 막힌 골목 끝에 다다랐다. 그때 슬레이트 벽이 점점 높아지면서 모든 시야가 가려졌다. 그때 내 속을 훅 관통하며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부터 인간의 지난한 삶이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 그것은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온갖 공상과 상상 속에서 헤매었으니 두뇌가 제작한 한 편의 영화일지도 모른다. 나의 처음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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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선영

 

 

 

     ‘처음’ 하면 광고에서 회오리를 만들던 초록색 병도 떠오른다. 처음이라는 말은 뒤에 어떤 단어와 나란히 있을 때 더욱 또렷해진다. ‘처음 직장, 처음 살던 집, 처음 연애….’ 가끔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손에 쥔 책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기억에 없다. 그렇게 생각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 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처음 기억에 닿게 된다.


     당신의 처음은 어땠는가? 처음 세상을 나왔을 때 보았던 것, 손을 뻗어 느꼈던 온도,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던 냄새 같은 것 말이다. 그 순간이 떠오르면 좋겠지만 전혀 기억에 없다. 

그런데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세상에 처음 나올 때가 생각난다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믿지 못하겠다면 일본 그림책 작가인 노부미의 《내가 엄마를 골랐어!》를 보자. 거기에는 하늘에서 엄마를 고르는 수많은 아가들이 나온다. 주인공인 엄마는 편의점에 삼각 김밥 사러 가는 일 외엔 딱히 잘하는 것이 없지만 주인공 아가의 눈에만은 사랑스럽게 보인다. 결국 자신의 엄마로 낙점하고 지구로 날아와 엄마 뱃속에 안착한다. ‘처음’과 ‘탄생’은 연결되어 있다. 탄생은 질문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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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엄마를 골랐어》, 노부미 글·그림, 위즈덤하우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릴 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분명한 답이 있고 그것을 내가 모르면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만 피스 되는 퍼즐의 겨우 몇 조각만 맞춰서 전체 그림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너무 답답했다. 그 질문을 계속 하다 보니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이 달라짐에 따라 수많은 답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선 ‘나’를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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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선영

 

 

 

 

     그러나 30여 년간 ‘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때는 ‘나’보다는 타인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니 타인에 대한 평가와 온갖 이야기만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자주 공허했다. 어떤 때는 내가 바라는 모습이 현재 나의 모습인 줄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박하는 일이 잦았다. 또는 더 이상의 설명이나 반박을 듣고 싶지 않아서 이 말을 많이 했다.


     “나는 원래 그래.”


     오랜 시간 편식을 많이 해서 해산물은 하나도 먹지 않았다. 친구들과 해물찜을 먹으러 가서도 콩나물만 먹고, 조개찜이나 생선구이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왜 안 먹게 되었는지를 바둑 복기하듯 따라가 보았다. 아마 처음 경험이 그리 즐겁지 않았던 모양이다. 첫 경험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두 번째 경험을 시도했을 가능성은 떨어진다. 그렇게 그것은 나의 원래가 되었다. ‘나’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원래’가 자주 등장했다. 그동안 ‘원래’라고 이름 붙여 하지 않거나 서슴없이 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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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선영

 

 

 

     “나는 원래 못 뛰어.”


     이 말도 참 많이 했다. 100m를 27초쯤 뛰었으니 원래 못 뛴다는 말이 맞는 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일까? 원래 나는 못 뛴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건 아닐까?

나를 만나는 시간인 ‘감정디자인’을 하면서부터 의심의 여지가 생긴 것이다. 이후부터는 줄곧 나를 관찰했다. 진짜 못 뛰는지, 잘 뛰는지 말이다. 그래서 반대로 “나는 잘 뛰어.”라고 가정하고 의도적인 상황을 만들어 노출시켜 보았다. 지갑을 화장실에 두고 온 상황에서의 달리기 시간을 가늠하기도 했다. 확실하게 빨라졌다. 이 실험에 ‘원래는 안 그래’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를 대상으로 한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원래였다면 안 가던 길을 가보고, 안 먹던 음식도 먹어보고, 영화나 옷 취향도 아가가 처음 세상을 경험하듯 새롭게 접근했다. 

     그렇게 계속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보며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었다. 첫 경험이 나빴던 것도 있고, 타인의 경험을 보며 두려움이 덧입혀진 것도 있었다. 그 실험의 결과가 전복되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을. “나는 원래 못 뛰어 -> 나는 못 뛰어 -> 나는 뛰면 꼴찌가 되니까 싫어 -> 그래서 나는 아예 뛰고 싶지 않아” 진짜의 마음은 감춘 것이 많았다. 돌아보니 인생의 어떤 시점에 나를 규정하는 틀을 만들고 하나씩 쌓아 결국 내가 된 것이다. 작년부터는 ‘나’라는 사람의 틀을 다시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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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선영

 

 

 

     ‘처음’인 것은 우리 인생의 틀을 만드는 원재료다. 말하자면 처음은 ‘가루’인 셈. 그 가루는 반죽을 하면 빵이 되기도 하고, 틀에 넣고 찍으면 벽돌이 되기도 한다. 그런 원재료를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필요한 양식이 되고, 집을 만들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나를 에워싼 높은 벽이 되어 숨 막히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아가로 지구에 처음 왔던 날을 상상해 본다. ‘나’라는 틀은 하나도 없어서 그저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하고 모든 것이 새로웠던 날을 떠올린다. 이제 어떤 틀을 만들어볼까? 그 틀은 언제든 부수어 가루로 날리고 새롭게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 


당신의 처음에는 원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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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영

작가

 

마음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감정도 디자인이 될까요?》, 애정결핍》, 엄마를 통해 나를 본다를 썼습니다.


서울에서 악어책방을 운영합니다.

 

 

sunyoungkoh@gmail.com

 

인스타그램 @abl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