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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5

SPECIAL

[숲노래의 어제책 이야기] 숲노래의 어제책 이야기 - 스물네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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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의 어제책 이야기 

헌책·옛책·손빛책으로 읽는 오늘 

스물네 번째 이야기

 

 

 최종규(숲노래)

작가

 

 

Emotion Icon 숲노래의 어제책 이야기 <헌책·옛책·손빛책으로 읽는 오늘>은  

헌책을 좋아하는 이가 들려주는 헌책 서평입니다.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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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초시대의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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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조각 끊고 자르고 쳐서 바쁘게 몰아쳐야 하는 오늘날인지 모른다.

그러나 바쁘기에 오히려 느긋하거나 느슨하게 하루를 보낼 만한 오늘날로 여길 수 있다.

너무 바쁜 나머지 간추린 줄거리만 슥 훑고서 지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모든 알맹이가 아닌 몇몇만 뽑은 줄거리만으로는 오롯이 알 수 없게 마련이다.


정보와 지식과 영상과 소식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이즈음은

거꾸로 더 천천히 더 깊이 더 넓게 더 고루 들여다볼 고빗사위일 수 있다.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가 하는 말을 싹둑 잘라서 “요점만 말하렴!” 하고 다그칠 수 없다.

사랑하는 두 사람도 “핵심만 말해!” 하고 끊는다면,

둘은 함께 살림을 지을 수 없다.


하루치기로 뚝딱 다녀오는 바쁜 여행으로는 오히려 품과 돈과 하루만 버릴는지 모른다.

빨리빨리 감아서 휙휙 넘기다 보면,

분초를 다투는 사회로 치닫는다면,

 우리는 그만 마음을 잊고 사랑을 잃으며 아이들하고도 멀어가는 굴레에 갇힐 수 있다.

새로 나오는 책도 잔뜩 있지만,

굳이 예전에 나온 책을 챙겨서 읽는다.

새 옮김말로도 읽고,

옛 옮김말로도 읽는다.

한글판도 읽고,

영어판이나 일본판도 읽는다.

예전에 알뜰살뜰 배우면서 손자국을 남긴 헌책을 가만히 넘기면서 새롭게 배우는 느슨읽기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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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Icon 《괴테名言集, 인생·예술·행복》

괴테 글, 이지상 옮김, 백조서점, 1959.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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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지은 말인 문고본(文庫本)입니다.

○○문고는 모조리 일본 책살림을 흉내낸 판입니다.

이름도 엮음새도 줄거리도 일본책을 베꼈고,

때로는 알맹이까지 통째로 훔쳤더군요.

1959년에 나온 《괴테名言集명언집, 인생·예술·행복》은 ‘白潮新書백조신서 11’라는데,

백조신서는 아예 일본 손바닥책 이름마저 따왔더군요.

책끝에 붙인 다른 손바닥책 이름과 줄거리를 담은 칸짜임도 일본책을 따라했습니다.

그래도 지난날 이 작은 《괴테명언집》을 한글판으로 읽던 분은 고맙게 여겼겠지요.

주머니에 쏙 넣고서 언제 어디에서라도 가볍게 펼치면서 아름말(명언)을 곱씹을 만하거든요.

우리나라는 1945년부터 거의 2000년까지 손바닥책도,

살림꾸러미(백과사전)도,

낱말책(사전)도,

그림책에 동화책까지도,

일본책을 여러모로 훔쳤습니다.

헌책집을 다니다가 이런 흉허물을 마주할 적에 쓴웃음을 짓는데,

좀 더디고 품을 많이 들이더라도,

손수 영어나 독일말이나 스웨덴말을 제대로 익혀서 옮겨 보았다면,

스스로 속힘을 키울 수 있어요.

영일사전영한사전으로 슬쩍한들 우리 영어 솜씨가 늘지 않습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름대로 작은책이나 손바닥책이라 할 만합니다.

주머니책이라 할 수 있어요.

조약돌책이나 씨앗책 같은 이름도 어울려요.

조그마한 씨앗 한 톨을 이 바쁘고 북새통인 한복판에 가만히 심고서 느긋느긋 보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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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Icon 《弁證法とはどういうものか》

 松村一人 글, 岩波書店, 1950.11.20. 첫 / 1971. 3.20. 36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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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집에서 책을 살필 적에 으레 일본 손바닥책을 뒤적입니다.

암파서점(岩波書店)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온 작은책을 들추는데,

일본은 진작부터 우리나라 이야기를 꾸준히 자주 내놓았고,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책을 값싸고 단출하게 여밉니다.

더구나 조그마한 책 사이에 담은 책갈피조차 남달라요.

책을 읽다가 꽂는 구실뿐 아니라,

책밭을 새롭게 헤아리는 징검돌도 담으니 쏠쏠합니다.

《弁證法とはどういうものか》변호법이란 무엇인가?는 1950년에 처음 나오고서 1971년에 36벌을 찍은 꾸러미이고,

이 책을 장만해서 읽던 분은 영진장서(永辰藏書)라는 글씨를 새겨서 꾹 찍었을 뿐 아니라,

바지런히 배운 손자국이 곳곳에 있어요.

이웃나라 손바닥책을 두 손에 품고서 살뜰히 배운 자국을 쓰다듬으면서

“오늘 나는 어떻게 익히며 가꾸려는가?” 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더 빠르게 바뀌는 물결이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도 갖은 이야기가 휙휙 쏟아지지만,

오히려 띄엄띄엄 천천히 읽고 새깁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바쁠수록 한 손에는 종이책을 들고,

다른 손에는 붓을 쥡니다.

사각사각 손글씨를 적습니다.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적바림합니다.

이제부터 일굴 살림길을 곰곰이 되새깁니다.

하루를 쪼개기보다는 하루를 통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책을 읽었으면,

그만큼 아이들하고 집안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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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규(숲노래)

작가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쓴다. 

사전 쓰는 길에 이바지하는 책을 찾아 헌책집-마을책집을 1992년부터 다닌다.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쉬운 말이 평화》,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곁책》들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