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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5

BOOK&LIFE

[SIDE A] 시간에 쫓기는 독서의 매력: 분초사회와 남이 읽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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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쫓기는 독서의 매력: 분초사회와 남이 읽던 책 
 

이지혜

영화평론가, 문화평론가
 
 
 
 
분초사회와 시간의 공간화

영화 <인타임>(앤드류 니콜, 2011)의 세계관 속 인간은 25세가 되는 즉시 노화가 멈춘다. 그리고 팔뚝에 새겨진 '카운트 바디 시계'에 단 1년이라는 시간을 부여받는다. 영화 속에서 화폐는 가치가 없다. 모든 사물과 재화는 시간으로만 거래된다. 예를 들어 커피 1잔의 가격이 4분이라면 스포츠카 한 대의 가격은 59년을, 즉 시간을 교환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따라서 영화 속 도둑이나 범죄자들은 돈을 훔치는 게 아니라 시간을 훔친다. 빈부격차 또한 시간의 소유량에 따라 정해진다. 죽음도 젊음과는 상관없이 온다. ‘카운트 바디 시계’가 0이 되면 목숨을 잃고, ‘카운트 바디 시계’ 속의 시간에 따라 25살의 모습 그대로 유한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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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인타임>(2011) 공식 포스터 네이버 영화


 
2024년 현대인의 삶도 <인타임> 속 세계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베스트셀러이자 한 해의 트렌드를 진단하는 도서 《2024 트렌드 코리아》는 2024년의 대표 키워드 중 하나로 분초사회를 선정했다. '시간이 금이다.'라는 관용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요즘 사람들은 시간을 분과 초 단위로 나눠서 쓴다. 
 
책 내용에 따르면 이는 경제의 모양이 물질을 소유하는 소유 경제에서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 경제로 이동하는 세태에 따라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얼마나 많은 공간에 얼마나 많은 사물을 채우느냐보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느냐가 현대 사회의 기조이자 삶의 척도가 된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1927년)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시간이란 의식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과거의 감정과 현재의 감정이 뒤섞이고, 미래에 관한 생각이 현재의 생각과 뒤섞이는 순수한 지속이 바로 시간이다. 그의 말처럼 사실 시간은 관념적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공간처럼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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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타임>(2011)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그러나 현대인은 시간을 임의로 공간처럼 나눠서 생각하고 사용한다. 요일별로 구획을 나누고, 출퇴근 시간과 여가 시간을 정한다. 왜냐하면 업무와 여가가, 공동체에 할애하는 시간과 나의 사적 시간이 구분되지 않는 삶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공간처럼 나눴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더욱 충만하게, 효율적으로 운용되고 있는지는 사실 의문이다.


시간의 가성비와 헌책

시간을 로, 공간처럼 분할한 덕분에 잠들기 직전 간신히 여가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여가의 사전적 의미는 '직장 업무에서 벗어나 개인이 자유롭게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일에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을 뜻한다. 그러나 60분 정도의 여가 시간 동안 내가 선택한 일은 되도록 많은 쇼츠를 보는 것이었다. 1시간 동안 골몰해 일기 한쪽을 써내는 것조차 노동으로 느껴졌다. 최대한 많은 종류의 여가를 즐기고 싶다는 욕망이, 시간의 가성비를 따져보아야 한다는 계산적 논리가 핸드폰을 들게 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15초에서 30초짜리 영상으로 요약한 쇼츠나 릴스를 보는 동안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고리즘의 흐름에 따라 알 수 없는 외국 노래에 모르는 사람이 춤추는 동영상을 바라보았다. 5분만 더, 3분만 더. 화면을 넘겼다. 손가락질이 계속되는 동안 무수한 시간이 지나갔다. 눈이 감기기 시작했는데 벌써 잠들기엔 이상하게 허무하고 억울했다. 스마트폰을 억지로 내려놓고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얼마 전 가입한 취향 공동체 모임에서 나눠 받아온 남이 읽던 책, 바로 헌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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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 서울책보고


취향 공동체 모임에 가입한 것은 여가가 아니라 일 때문이었다. 평론가이자 연구자라는 직업 특성상 한자리에 고여서 혼자 보거나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일이 잦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 세계에만 천착해 좋은 글을 써내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됐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다양한 문화를 나눠볼 필요성을 느꼈다. 말하자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여가 시간을 활용한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간단한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취향에 관련된 모임 특성상 별명과 좋아하는 것 정도를 말하면 됐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차례가 돌아왔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간밤에 본 수많은 쇼츠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영화와 문화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평론가가 되었고,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연구자가 되었다. 그런데 직업인으로서의 프로필은 설명할 수 있어도 스스로 취향은 설명할 수 없었다. 최악이었다.

우물 쭈물거리다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음 순서가 진행되었다. 취향의 책 교환식이었다. 자기가 읽던 책을 가져온 사람도 있고, 새 책을 준비해 온 사람도 있었다. 각자가 책을 가져온 이유와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고, 그 책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 중 한 명을 골라 책을 증정하는 방식이었다. 일부러 순서를 미루고 사람들의 책 설명을 가만히 들었다. 미디어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에 그렇게 오래 몰입해 본 건 참 오랜만이었다. 

SF 작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대한 설명이 시작됐다. 
"이 책은 단편집인데, 여기 수록된 작품 중 〈네 인생의 이야기〉는 감독 드니 빌뵈브가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2016년에 영화화하기도 했어요." 
두어 명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설명을 들었다.
"저 사실 이거 곱게 보고 싶었는데, 너무 많이 읽어서 헌책이 되었어요. 특정 페이지에 접어놓은 자국도 있고 밑줄 그은 부분도 있어요."
내가 손을 든 것은 그때였다.

신청자가 다수이므로 꼭 책을 가져가고 싶은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영화를 좋아해서 책도 읽어보고 싶었어요." 
앞사람의 이야기가 끝났다. 드디어 내 차례였다. 
“좋아해요! 저 헌책 좋아해요. 특히 남이 밑줄 그은 책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책이 있는데도 일부러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볼 때도 있어요. 같은 문장을 좋아했는지, 다른 사람은 어디가 좋았는지 알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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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공동체에서 나눔 받은 책 ⓒ이지혜



취향의 가성비와 헌책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결국 내 손에 들어왔다. 덕분에 내내 부끄러웠다. 밑줄 그은 책, 그러니까 누가 이미 한번 봤던 책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책의 주인이 무척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감동할 만큼 순수하고 건전한 의도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취향의 가성비를 챙기기 위해 좋아한 것과 다름없었다. 취향의 가성비란 사실 시간의 가성비와도, 지적 욕망이자 허영과도 같은 말이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책을 읽는 일이 직업이나 마찬가지라 어떤 때는 낱말과 문장을 바라보는 일이 더할 나위 없이 지겨웠다. 긴 영상을 15초에서 30초 이내로 요약해 게시하는 쇼츠나 릴스처럼 누군가가 내용을 문단마다 요약해 줬으면 할 때도 있었다. 

그때 생각해 낸 방법이 남이 읽던 책을 보는 것이었다. 연구에 필요한 서적을 구매해 보다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일부러 지도교수님께 책이 있는지 묻고 빌려서 봤다. 지도교수님이 그어 놓은 밑줄들을 따라 읽다 보면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보물들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그마저도 안될 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봤다. 일부러 제일 너덜거리는 책을 빌려왔다. 그리고 누군가 공공의 책에 염치없이 줄 그어 놓은 흔적이 있길 바라며 책을 펼쳤다. 

그러니까 나는 진실만 말하고 책을 얻어오긴 했는데, 상대방의 감동한 표정이 내내 잊히지 않아 마음이 괴로웠다. 취향에서도 가성비를 따지다니 내가 정말 구제 불능처럼 느껴졌다.

까만 어둠이 내린 새벽, 어쩐지 빚진 마음으로 책을 펼쳐 후루룩 페이지를 넘겼다. 총 477페이지짜리 책 군데군데 물 얼룩이 있었다. 책을 좀 더 뒤지던 중 단편 〈바빌론의 탑〉에서 샤프로 조심스럽게 그은 것만 같은 밑줄 몇 개를 발견했다.

"밤이 지상에서 하늘을 향해 탑을 올라오는 광경을 볼 수 있어."(26쪽)
"그러더니 순간, 어둠이 위를 향해 펼쳐지는 천개(天蓋)처럼 탑을 올라오기 시작했다."(26쪽)
"밤이란 하늘을 향해 드리우는 대지의 그림자였다."(27쪽)
 
다음날,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책을 펼쳤다. 한참 사라졌던 밑줄은 단편 〈이해〉의 문장 한 부분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이번에는 밑줄 옆에 아주 작은 물음표가 함께 있었다. 나는 쿡쿡 웃다 조금 골몰했다. 그리고 '그러게요, 저도 이 문장은 이해가 안 가요.'라고 속으로만 대답했다.
그리고 또 다른 날,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에는 형광펜으로 줄을 그은 부분들이 등장했다. 초록색 형광펜과 푸른색 형광펜이 번갈아 나왔다. 어떠한 기준으로 색을 나눴을까 상상하던 중 푸른색으로 줄 그어진 한 문장에서 나도 모르게 읽어나가기를 멈췄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의지란 의식의 본질적인 일부인 것이다."(211쪽)

몇 번이고 이 문장을 되뇌고 곱씹었다. 어떤 이유에서 줄을 그었건, 나는 이 문장이 좋았다. 나를 멈춰 서게 한 문장에서 다른 사람도 멈춰 섰다는 것을 지각한 순간, 마치 쇼츠를 보고 있던 것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시간이 쇼츠를 볼 때처럼 결코 무의미하거나 허무하지는 않았다. 아직 내 안에 건강한 지적 허영이 남아 있음에 감사했다. 타인의 요약을 읽어나가고 새로운 밑줄을 칠 힘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위안이 됐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타인의 밑줄은 타인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헌책의 문장에서 책을 나눠준 다른 사람의 성찰과 세계관을 보며 내 세계를 대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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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의 일부 ⓒ이지혜


"하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213쪽)
"네가 지각하는 유일한 순간은 오로지 지금뿐이야. 너는 현재 시제 속에서만 살아"(217쪽)


그리고 다시 여러 날, 푸른색 밑줄이 끝났다. 그 후로도 책을 완전히 다 읽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책을 완전히 덮고서, 이제는 친구가 된 원래의 책 주인에게 연락했다. 
"저 서울책보고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는데, 나눠주신 헌책 이야기 좀 써도 될까요?"
흔쾌한 허락을 받고 이 글을 적어 내려가고 있다. 이 책에는 이제 두 사람의 밑줄과 요약이, 세계관이, 인생의 이야기가 함께 적혔다. 아마도 곧 세 사람의 밑줄이, 네 사람의 메모와 낙서가 적히지 않을까. 이 책이 여러 사람의 손을 떠돌기를 가만히 빌어본다. 수많은 밑줄이 그어지길 바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책이 당신의 여가 시간에도 가서 닿기를, 당신의 밑줄도 그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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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영화평론가 / 문화평론가

 

영화전문매체 〈코아르Coar〉(클릭하면 이동)에 영화 평론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국내판) 웹진〈문화톡톡〉(클릭하면 이동)에 문화 평론을 매월 고정 연재하고 있다.

2023년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계열 박사과정생 연구지원금 수혜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소속으로 한국문화콘텐츠 연구자로도 활동 중이다. 

 

▷문화전문매거진 《쿨투라》 제 16회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2022)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전북부문 심사위원(2023)

서울역사영화제 프로그래머(집행위원)(2024)

 

 leehey@khu.ac.kr

인스타그램@leehey_c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