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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5

BOOK&LIFE

[SIDE C] 초인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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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종이 울렸다 
 

고선영

작가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렸다. 키가 크고 삐쩍 마른 노인을 맞았다. 응접실로 안내하고 겉옷과 장갑을 받아 걸어두었다. 실내 온도 때문에 노인이 쓴 안경에 김이 서렸다. 따듯한 홍차와 스콘을 곁들였다. 그는 안경을 닦지 않고 기다렸다. 홍차도 바로 마시지 않고 시야가 맑아진 후에 찻잔을 들었다. 한눈에 봐도 섬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 준비가 되었는지를 물었다. 나의 상태를 살피고 나서 내가 홍차에 크림을 넣고 한 모금 마실 때까지 조금도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이제 준비를 마쳤다. 
노인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놓았다. 목소리는 맑고 속도도 적당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깊게 빠져들었다. 눈을 깜빡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이해가 잘 안 되어 손톱을 조금 깨물기도 했다. 특히 프란츠 이야기를 할 때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잠깐 쉬고 싶었다. 집중이 느슨해지자 그도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깐 같이 창문을 바라봤다. 새가 날았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떼로 날아다니는 기러기와 기러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내가 다시 노인과 눈을 맞추자 다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야기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대개는 흥미로웠다. 반복해서 잔소리하는 내 주변의 어른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노인은 당분간 우리 집 게스트룸에서 머물기로 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매일 조금씩 들었다. 
“언제나 물어야 해, 언제나 의심해야 하구.”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의 눈은 깊은 호수 같았고 반짝였다. 나는 노인의 이야기 속 데미안이라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채근한 적이 없다. 어떤 날은 십분, 어떤 날은 2시간 넘게 나의 컨디션과 집중하는 정도를 보며 대화를 나눴다. 가끔 심각해지거나 웃을 때 나도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와 나눈 대화는 삶을 사는 동안 종종 떠오르겠지. 그러다 결국 내 인생 전체에 깊게 스며들어 나 자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작가 헤르만 헤세를 상상한 것이다. 어릴 때 언니가 사 놓은 《데미안》을 읽었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앓기 시작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무언가가 내 마음 밭에 씨를 뿌렸다. 그 씨앗은 내 안에 뿌리를 내리려고 나를 해체시키는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후 그의 다른 작품인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에도 한참 빠져 있었다. 헤르만 헤세와 대화를 나누고 그의 생각과 씨름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모든 작가와 이런 과정을 거쳤다. 결국 나도 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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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고선영의 저서 《애정결핍》, 《엄마를 통해 나를 본다》를 서울책보고 독립출판물 서가에서 만날 수 있다.

 
어릴 때는 소설과 뇌 관련 책만 읽었다. 소설은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어서였고, 뇌 주제는 내 고민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너무 생각이 많았다. 이 머리통에서 생각을 수도꼭지처럼 잠글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줄곧 했었고 가끔 실제로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열된 엔진에서 김이 나오듯 말이다.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할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살다가 어른이 되고 일하는 분야에 필요한 자기개발서를 읽어야 했다. 그건 정말 고역이었다. 그래도 광고나 홍보, 건축에 관한 주제는 읽을 만했다. 그리고 지금은 마음을 연구하는 일을 하면서 광범위한 주제로 책을 읽는다. 
 
나는 책이 재미있어서 읽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 순간 선택한다. 그럴 때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니까 읽기도 한다. 몇 년째 사람들과 독서 모임에서 같이 읽는데 여럿이 함께 대화 나누려고 읽을 때도 있다. 한때는 4~5권을 동시에 보기도 했다. 피로 얼룩진 시체가 나오는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가벼운 만화책을 보기도 했다. 에너지가 고갈된 것 같으면 그림책을 보거나 요리책 또는 여행 주제의 책을 보면서 그때그때 변화를 주기도 했다. 균형을 맞추면서 읽었던 시기였다. 지금은 그냥 한 권을 아주 천천히 읽는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나의 독서 방법은 변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전혀 변하지 않는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책을 고를 때 나만의 의식이다. 성인이 되어 내 월급으로 책을 살 수 있을 때 나는 곧장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연결되는 서점에 도착하자마자 코를 킁킁거렸다. 그다음 손을 살짝 뻗어서 수맥을 찾는 레이더처럼 사용하곤 했다. 그렇게 서가에서 서가로, 꽂히거나 누운 책을 손으로 먼저 탐색했다. 그때 항상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늘 끝내주는 사람을 만나게 해줘. 넌 알지? 지금 당장 나에게 꼭 필요한 멋진 사람!’
그렇게 혼잣말을 한 다음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법처럼 탄성을 지르게 만드는 책을 만나게 해주었다. 정말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나는 책을 그저 종이를 엮어 만든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그것도 완전히 나에게 맞추어 나의 시간과 공간, 컨디션을 배려해서 수도 없이 오가는 대화 말이다. 그러니까 책은 내 인생에 둘도 없는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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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와 작가는 책을 통해 시공의 제한이 없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너무 똑똑하고, 바쁘다. 책을 나 대신 누군가가 읽고 더 나은 책을 골라주기도 하고, 짧은 카드 뉴스로 요약된 것을 읽기만 해도 대략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다. 주문한 책을 조금 읽어봤는데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하면 바로 중고마켓에 올린다. 시간을 아끼는 것으로도 모자라 분초를 아끼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유튜브를 보고, SNS를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동영상도 점점 더 짧은 것을 찾고 드라마나 뉴스도 재생속도를 빠르게 해서 훑어본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분절된 정보의 홍수가 뇌를 피곤하게 한다. 스마트폰 하나를 들고 새벽까지 자극적인 정보에 뇌를 담갔다 뺐다 한다. 가장 큰 문제가 책에 집중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 분초를 아끼려다 정작 중요한 알맹이를 죄다 도둑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책에 집중하는 능력만 떨어졌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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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책? 스마트폰? 이름 그대로 똑똑한 스마트폰은 우리를 책에 집중하기 힘들게 한다.

 
어릴 때부터 나를 괴롭히는 생각의 목소리가 크고 많아서 힘들었다. 현재는 감정디자인이라는 마음 훈련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서 훈련 중인데 많이 편해졌다. 그랬던 내가 최근 달라졌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일을 할 때가 많다. 책보다 영상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러다간 정말 내가 싫어하는 나가 될 것 같아서 요즘 노력 중이다. 다시 내 인생에 둘도 없는 친구를 찾고 있다. 최근에 《맡겨진 소녀》를 쓴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를 만났다. 너무 좋은 작품은 쇼츠 영상이나 책 소개 영상보다 먼저 만나서 기쁘다. 문장과 단어 그리고 행간을 숨죽이며 상상할 때 재미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재미는 작가가 그려낸 캐릭터에 깊게 공감할 때 더욱 커진다. 그것이 현실 세계의 관계로 확장된다. 

책은 느리고 건강한 자극이다. 심심하고 담백한 맛이다. 분초 사회에서 소비되는 콘텐츠는 가공식품이다. 물론 짧은 것이 좋을 때도 있겠지만 나는 건강한 맛을 고르기로 마음먹는다. 어릴 때 헤르만 헤세와 몇 년 동안 끙끙대며 묻고 답했던 시간을 사랑하니까.

이제 초인종이 울린다. 또 누가 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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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영

작가

 

마음을 연구하는 고선영입니다.

감정도 디자인이 될까요?》, 애정결핍》, 엄마를 통해 나를 본다를 쓰고 작은 책방을 운영합니다.

 감정디자인으로 마음을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