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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4

SPECIAL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 키덜트 문화에 관한 몇 가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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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덜트 문화에 관한 몇 가지 단상

 

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Emotion Icon영화학 박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필자가 영화와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는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1.

 

오래전, 같은 교회를 다니던 신혼부부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일이다. 장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피규어들에 눈길이 갔다. 잘은 모르지만 일본 캐릭터들 같았다. 남편이 사 모은 거란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것들도 있는데, 지인들이 일본에 갈 때 부탁해서 사 오기도 한다고 했다. 비싼 거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왜 저런 데 돈을 쓰는지 모르겠어. 애들처럼.” 

남편의 항변은 이렇다. 어릴 때 가난해서 다른 아이들이 장난감 갖고 노는 걸 쳐다보기만 했고, 바쁜 부모님을 졸라보는 것조차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고. 이제는 내가 번 돈으로 취미 생활하면서 그때의 서러움을 좀 덜어보겠다는 건데 그게 뭐가 나쁘냐고.

나는 피규어 수집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말도, 어릴 때 못 해봤던 걸 누리고 싶은 마음도 너무 이해되어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못했다. 아내의 말은 이성적이었고, 남편의 말은 감성적이었다. 사실, 아내가 마론인형을 모으고 있었다면 아내에게 맞장구를 쳐주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가정 형편이 넉넉지는 않아서 사고 싶은 마론인형 팸플릿을 꼭 쥐고 잠들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부모님이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 건 무리였으리라. 어른이 되고 나니 자연히 모든 종류의 인형에 관한 관심도, 애정도 사라졌지만 그게 한이 된 사람이라면 형편껏 풀겠다는데 뭐가 문제랴. 

그러고 보니 연락 안 한 지가 한참 됐는데 그 부부, 지금까지 잘살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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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담카페를 찾은 마니아들이 건담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있다. /  

2. 피규어가 전시된 일렉트로마트에서 한 남성이 아이언맨 로봇을 살펴보고 있다. / 

3. 건담카페에 전시된 프라모델 © 월간중앙

 

 

#2. 

 

40대 싱글 여성들에게 연애가 어려운 이유는 연애가 가능한 남자를 만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주변의 또래 남자들은 대부분 이미 다른 여자의 남자인데, 특정 직업군을 제외하면 새로운 인간관계가 생길 일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남사스럽게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는 것도 꺼려지고, 데이팅 앱은 사기꾼들 가려내는 게 피곤하다. 취미를 공유하는 동호회 같은 데서 만나는 케이스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등록하는 독서 모임에는 늘 여자들만 온다. 

어느 날, 친구 A가 말했다. 

“프라모델 동호회는 어때?”

지인 중 하나가 여기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는 거다. 여성의 비율이 낮아서 인기가 많았다나. 사람들이 둘러앉아 말없이 몇 시간 동안 로봇 조립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오긴 하지만 목적이 있다면 뭐 어떠랴. 그런데 그런 거 좋아하는 남자들은 오타쿠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을뿐더러 여가 시간엔 조립하는 데만 집중해서 바람도 안 피우고 다른 돈 드는 취미도 안 가진단다.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감성적인 면까지 있어 여자들 마음까지 잘 알아준다나. 

A의 지인은 혹시 이런 키덜트의 특성을 간파하고 프라모델 동호회에 나간 걸까? 

 

 

 

#3. 

 

마론인형 하니까 올해 개봉한 〈바비〉(감독 그레타 거윅)가 떠오른다. 북미에서는 엄청나게 흥행했고, 유럽과 동남아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꽤 떠들썩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참패했다. 나름대로 화제는 되었는데, 왜 한국에서만 홀대받는지가 이슈가 되어 외국 언론사들까지 필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할 정도였다. 최근 페미니즘에 대한 한국인들의 양극화가 바비에 대한 거부감 혹은 무관심을 불러왔다는 말도 근거가 없지는 않으나 사실은 바비 인형에 대한 향수가 없다는 점이 더 강력한 요인이었다. 애초에 애착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소재로 한 영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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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비〉는 바비랜드의 바비와 켄이 현실 세상으로 오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시얼사 로넌과 엠마 왓슨이 출연한 〈작은아씨들〉(2019)의 그레타 거윅 감독이 연출했다.

 


바비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올 초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와 대비된다. 《슬램덩크》와 함께 열 대를 보낸 중장년층이 그 시절을 추억하며 영화관을 찾다가 자녀뻘 되는 십 대, 이십 대가 합류하면서 말 그대로 열풍을 일으켰고, 영화는 약 477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수입사가 애초 기대했던 관객 수가 50만 명 정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흥행하자 관련 굿즈도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굿즈 팝업 스토어를 여는 백화점 앞에는 오픈런을 하려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서점가도 당연히 난리였다. 신장재편판 《슬램덩크》 시리즈가 베스트셀러 20위권 순위를 점령했고, 헌책방에도 《슬램덩크》는 물론 만화가 연재되었던 챔프까지 찾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나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본 후, 근처 카페 구석에 꽂혀 있는 만화책들을 떠올렸고, 날을 잡아 1권부터 차근히 읽어내려갔다. 어제 일은 잘 기억이 안 나도 십 대, 이십 대 때 접했던 것들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하게 떠오르는 경향이 있는데, 《슬램덩크》도 그랬다. 처음 이 만화를 접했을 때의 그 감성이 조금씩 깨어나 나를 흔들기 시작했고, 애니메이션 초반에 강렬한 음악과 함께 주인공들이 한 명씩 스케치 되는 장면에서의 전율, 심장의 쿵쾅거림이 날긋한 만화책을 넘기면서 되살아나기도 했다. 40대에 자주 느낄 수 없는 기분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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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책보고에서는 《슬램덩크》(대광서림 각권 3,000원) 같은 추억의 만화와

〈챔프〉, 〈윙크〉, 〈댕기〉, 〈점프〉같은 만화잡지들을 만날 수 있다. 

 

4월에 개봉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흥행도 비슷한 맥락에 있을 것이다. 35년 전 콘솔 게임의 추억과 저 유명한 콧수염 캐릭터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발길을 영화관으로 이끌어 239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바 있다. 새로 나온 《슬램덩크》 만화책도 시리즈로 사고 싶었고, 인테리어 소품으로 미니 아케이드 게임기 같은 걸 살까도 고민한 적이 있지만, 선뜻 지갑이 열리지 않는 걸 보면 나는 그저 어덜트adult인 것 같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추억을 찾아다니면서 내게 소중했던 것들을 현재로 끌어와 계속 향유하고자 하는 키덜트들을 존중하고, 그런 문화가 꽤나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화와 콘텐츠가 명멸하듯 짧게 소비되는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 시대의 키덜트들은 나이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주눅 들지 말고 당당히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프라모델 동호회는 내게 무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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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그런대로 행복한 영화 호사가

지금은 문화 전반에 관해 얘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만들고 있다.

여행 에세이집 《세도시 이야기》(공저), 짧은 소설로 릴리 이야기를 썼다.

 

 

 

 

 

섬네일 : 영화 〈바비〉(2023)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14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