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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3

SPECIAL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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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레트로

 

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Emotion Icon영화학 박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필자가 영화와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는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집에는 언제나 책이 많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던 집의 천장까지 닿던 책장들에는 소설은 물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여행 서적, 신앙 서적, 문예 월간지 등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었고, 늘 놀거리를 찾아 구석구석 집을 탐험하던 나는 자연스레 책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한글을 몰랐을 때는 사진이 많이 실린 책들을 구경하다가 더듬거리며 글을 읽게 되자 나는 어린이 문학전집을 바둑판 공책에 옮겨적기 시작했다. 내게 책을 통째로 필사하던 시절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 책이 많은 편이라는 것과 나의 독서량이 또래들보다 월등히 많다는 사실은 열 살 때쯤인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놀라는 걸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게 자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동시에 깨달았다는 게 문제지만. 

 

허영심은 그 대상이 독서라 해도 좋을 리가 없었다. 나는 일찌감치 학교 도서관, 상가의 책 대여점을 전전하며 소년·소녀 문학을 섭렵한 다음, 여러 차례 이사를 하면서도 부모님이 결코 버리지 않았던 빛바랜 소설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갑자기 두꺼운 고전 명작들을 읽으려니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가로줄로 인쇄된 《갈매기 조나단》, 데미안, 노인과 바다, 유리알 유희, 죄와 벌등을 떼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점점 집안에 읽을 책이 떨어져 가자 중학교 1학년 독서 시간에 내가 학교에 가져간 책은 게오르규의 25시였다. 담임 선생님이 내 책을 집어 들더니 한참 동안 책과 나를 번갈아 보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책을 이해나 하면서 읽고 있는지 반신반의하셨던 것 같다. 사실, 그 절반의 의심은 절반의 믿음보다 더 정확했다. 아무리 독서량이 많고 조숙했어도 십 대 초반의 소녀가 고전에서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때까지의 경험에 비례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한 마디로 매우 빈약한 수준이었다. 그때는 읽은 책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나는 상당 부분 독서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 책들의 수준과 내 수준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우까지 범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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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작가 스스로가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라고 밝혔듯, 

죄와 속죄에 대한 다양한 인식들이 팽팽하게 갈등하고 교차한다. (문화서점 상하 6,000원) 

 

대학원 시절, 아르바이트로 독서 논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청소년이 주체가 되는 청소년 문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동시대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와 고민이 여실히 담겨 있는 장르로, 십 대들이 감정이입 하기에도 좋고, 어른들도 한 번쯤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며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유명한 외국 작가의 고전보다 한국 청소년 문학을 좋아했고, 해석과 토론의 수준도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당시 서른 즈음이었던 나는 청소년기를 지나온 지 비교적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이 장르를 통해 급변하는 사회와 더불어 우리 때와는 한참 달라진 아이들의 생활 및 정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나는 십 대 때 이런 책들을 만나지 못했을까. 어쩌면 읽을 기회가 있었어도 시시한 책들로 간주하고 무시해온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때쯤 마침 창비 청소년문학상이 만들어졌고, 그 1회 수상작으로 김여령 작가의 완득이가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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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간 후 15년간 전 세대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국내에서만 80만 부 판매된 《완득이》는

일본, 독일, 멕시코 등 8개국에 번역 수출되며 해외 독자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황룡서점 3,000원) 

 

완득이는 선천적 질병으로 등이 불룩한 아버지, 남들보다 약간 모자란 민구 삼촌과 함께 옥탑방에 살고 있다. 이웃에 사는 담임교사 이동주는 반 아이들에게 공부보다 학생으로서의 태도나 예의를 더 강조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이상하게도 완득이에게는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완득이는 그런 담임이 너무 싫어서 매일 교회에 가서 ‘똥주를 죽여달라’고 기도한다. 어느 날, 동주는 완득이가 모르고 있던 베트남 출신의 엄마에 대해 얘기해준다. 카바레에서 춤을 추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완득이 갓난아기일 때 집을 나갔었는데 요즘 가까운 그곳에서 일한다는 것이다. 완득은 갑작스러운 엄마의 출현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 밖에도 사사건건 자신을 괴롭히는 듯한 동주, 남자애들한테 인기도 많은데 굳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는 모범생 윤하, 가난, 캄캄한 미래 등 완득이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고민의 종류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예외 없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십 대들에게 완득이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평범한 주변 친구들이기도 하다. 

 

〈완득이〉는 2011년 개봉한 이한 감독의 영화로 대중들에게 더 잘 알려졌다. 원작에서 크게 바뀌지 않은 작품인데, 당시에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약 530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예상을 뛰어넘은 완득이의 성공은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 등 자극적인 요소가 없어도 흥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예다. 완득이에는 악역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초반에 완득이네 및 동주와 종종 갈등을 빚는 이웃 아저씨도 후반부에 가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님이 밝혀진다. 교사치고 괴짜인 듯 보이는 동주는 사실 마음이 따뜻하고 책임감 강하며 지역 사회의 문제까지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하는 아버지에게 환멸을 느끼고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전사는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 중 하나다. 무엇보다 주인공 완득이는 공부는 못하고 싸움은 잘할 뿐, 여느 불량 청소년과는 다르다. 여느 평범한 십 대에게 있을 법한 반항심, 사회에 대한 불만 등이 때로 거칠게 분출될 뿐이다. 대다수의 청소년이 방황을 거쳐 자신의 길을 찾아가듯 꿈이 없던 완득이도 복싱이라는 스포츠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물론, 보편적 십 대로서의 완득이 이면에는 특수성도 자리하고 있으니 바로 그의 가정환경이다. 작가와 감독은 조심스레 우리 사회의 일부가 된 다문화 가정 이슈를 꺼내 든다. 그러나 완득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행동을 폭력적으로 그리지 않고, 지역 커뮤니티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태도를 취하면서 착한 영화로서의 성격을 유지하는 동시에 결론까지 따뜻하게 이끌어낸다. 장애가 있는 아버지도, 똑똑하지 못한 민구 삼촌도, 외국인 노동자 핫산도 모두 다양성 존중이라는 주제를 위한 캐릭터들이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완득이는 할리우드의 PC 운동 보다 몇 년이나 더 앞서간 작품이었다.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매체들은 앞다투어 한국의 다문화 가정을 조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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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 노동자 핫산은 완득이에게 처음 킥복싱을 알게해 준 사람이다.

교회에서 완득이를 계속 자매님이라 부르는 웃음 포인트도 있다.  © 이데일리

 

교훈적인 주제나 모두 하나가 되는 해피엔딩이 다소 오그라들기도 하지만, 완득이는 청소년 문학의 가치를 명확히 드러낸 중요한 작품이다. 청소년이 주체가 되어 독자들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십 대에게 청소년 문학은 수백 년 된 어떤 고전보다 더 소중한 작품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진작에 이 장르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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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그런대로 행복한 영화 호사가

지금은 문화 전반에 관해 얘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만들고 있다.

여행 에세이집 《세도시 이야기》(공저), 짧은 소설로 릴리 이야기를 썼다.

 

 

 

 

 

섬네일 : 영화 〈완득이〉(2011) 포스터 중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62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