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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3

BOOK&LIFE

[SIDE A] 그림책에서 발견되는 청소년의 삶 - 사춘기, 주체 확립의 마지막 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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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서 발견되는 청소년의 삶
- 사춘기, 주체 확립의 마지막 고비
 
김수영
동화작가, 아동문학연구자, 아동문학박사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태어난 후 상당 기간 양육자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어렵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와 자신을 한 몸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그러다 분리의 순간이 오면 어머니를 금지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분리는 독립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고 이후에 아이는 독립된 주체로서 사회의 일원이 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어머니가 아이를 향한 사랑을 기한 없이 베풀고 그 둘을 분리해야 할 아빠의 역할 또한 미미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아이가 한 사람의 어른으로, 독립된 주체로 바로 서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아이가 분리되지 못하면 어머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이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전락하는 위험한 상황을 맞는다. 어째서 위험하다는 것인지 그림책 《제제벨 - 착한 어린이 대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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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제벨 - 착한 어린이 대상!》은 어른들에게는 하잘것없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아주 심각하게 여겨지는 문제들을 즐겨 다루면서

어린이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영국의 유명한 그림책 작가, 토니로스가 지은 책이다.(키위북스, 2020)

 
주인공 제제벨은 흠잡을 데라고는 없는 완벽한 모범생이다. 흔한 장난 한번 치지 않고, 옷을 더럽히는 일도 없고, 학교에서는 늘 일등만 한다. 아플 때 약도 잘 챙겨 먹고 혼자서 옷도 잘 챙겨 입고 어른들이 싫어할 만한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제제벨에게 ‘착한 어린이 대상’을 수여하고 공원에는 제제벨 동상도 생겼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악어가 나타난다. 다들 도망쳤지만, 제제벨은 복도에서 뛰면 안 된다는 규칙을 지키다가 그만 악어 입속으로….
 
제제벨처럼 착한 아이가?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은 이 그림책의 결말이 불편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왜? 완벽한 제제벨이 아니라 부모님 말씀 안 듣고 공부는 뒷전이고 온종일 노는 것만 생각하는 제제벨의 친구들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칭찬하는 제제벨은 과연 행복했을까? 말 잘 듣는 제제벨의 얼굴에는 뾰루지가 한가득하다. 대통령으로부터 착한 어린이 대상을 받고 온 나라가 칭찬하지만 갈수록 표정도 험악하게 바뀐다. 착한 아이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보인다. 그런데도 제제벨은 왜 그토록 완벽한 아이가 되려고 애썼을까? 그래야 어머니에게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잃을까 봐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는 지점에 머무르는 것은 주체이기를 포기하고 대상으로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제벨은 마지막에 악어에게 먹힌다. 어머니가 시키는 일만 착실히 하면 됐던 제제벨 앞에 악어의 침입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주체적이지 못한 제제벨은 피할 수가 없다. 제제벨이 악어에게 먹히는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새삼스러운 것도 없다. 제제벨은 이미 어머니에게 ‘먹힌’(종속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어머니에게 종속된 삶을 살지 않으려면 제제벨처럼 말 잘 듣는 아이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도 안락한 품을 떠나야 하는 아이에게도 분리란 힘든 것이다. 결국, 어머니 품을 포기하고 스스로 욕망하는 주체로 살기 위해서는 아이도 스스로 자기 몫의 시련을 견뎌야 한다. 때가 되면 그림책 《알》에서처럼 아이도 목숨을 건 고군분투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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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가 몇 살이든 자신만의 상상으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는 열린 결말이 매력적인 그림책 《알》은 

2010 MENTION 선정 작가 이기훈의 작품이다.(비룡소, 2016)
 
주인공 아이는 냉장고에서 ‘알’을 잔뜩 꺼내 이불 속에 파묻고 부화에 성공한다. 그런데 알에서 병아리가 아니라 온갖 수상한 동물들이 잔뜩 깨어난다. 아이가 어머니 눈을 피해 먹을 것을 나르느라 바쁜 가운데, 동물들은 쑥쑥 자라 어느새 방이 터질 듯이 꽉 찬다. 더는 집에 있기 힘들어지자 아이는 동물들을 데리고 나가서 오리 배를 탄다. 오리 배는 고래에게 삼켜졌다가 물기둥과 함께 발사되면서 진짜 오리가 되어 멀리 날아간다. 시간이 흐르고 오리 한 마리가 어머니가 기다리는 아이 방 창가로 날아와 커다란 알을 낳아 두고 날아간다. 
 
완벽함을 요구하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아이의 무의식이 알에서 수많은 동물을 깨운다. 온갖 말썽을 부리는 동물들은 억눌려 있던 아이 내면의 충동과 욕망의 표출을 의미한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동물들을 감추기 힘들었던 아이는 모두 이끌고 나가서 오리 배를 탄다. 숨 막히는 ‘어머니의 세계’에서 커지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더는 외면할 수 없어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탈출은 순조롭지 않다. 성장이라는 것이 응당 그렇듯이. 아이가 탄 오리 배는 폭풍우를 만나고 고래에게 잡아먹히는 등 갖은 시련을 겪은 뒤 고래의 분수공을 통해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아이와 동물들은 완전한 한 마리 오리로 통합되어 멀리 날아간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를 기다리는 어머니 앞에 오리가 나타나더니 창틀에 알을 하나 두고 떠난다. 
과연 어머니는 알 속에서 보고 싶은 아이를 만났을까? 그건 어머니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아이를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한다면 아이가 나타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다시 볼 수 없을 테니까. 왜냐하면, 아이는 오리가 되어 날아간 순간 주체성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알던 품 안의 자식은 더는 없는 것이다.
 
그림책 《알》의 주인공이 겪는 목숨을 건 탈출기는 ‘사춘기’의 격랑과 닮아있다. <알>에서처럼 사춘기에 격변하는 감정의 부침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 필연적이다. 스스로 독립된 주체로서 ‘나’를 세우는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의 격해지는 감정은 자신을 삼키려는 어머니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아이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도 독립하지 못하면 아이는 주체로서 서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종속되어 살게 된다. 이는 아이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따라서 청소년기에 아이의 감정변화가 심해지면 그것이 어머니로부터 분리되기 위해 보내는 마지막 신호라는 것을 알아챌 필요가 있다. 그때 부모가,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순조롭게 분리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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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동화작가, 아동문학연구자, 아동문학박사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아동문학을 공부하고
동대학원에서 〈강소천 연구 – 트라우마와 애도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 받음
이후 한국라깡임상정신분석협회에서 정신분석 임상가과정 수료 
서울시립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건국대학교, 협성대학교 등에서
아동문학 이론 및 동화창작을 강의함
도서관, 학교, 서점 및 다양한 인문학 단체 등에서 글쓰기 강좌, 그림책 인문학 강연 진행
지은 책으로는 그림책 인문에세이 《나를 알고 싶어서 그림책을 펼쳤습니다》, 
동화 내 이름은 퀴마>, 사랑해 언니 사랑해 동생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