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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2

SPECIAL

[오은의 오늘의 시] 헌책_헌책 요정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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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헌책 요정의 방문

 

                          오은



간밤에 헌책 요정이 찾아왔어 유령이냐고 물었더니 요정이래 유령과 요정의 차이에 대해 물었지 유령은 죽은 사람의 혼령인데 자기는 죽지 않았다는 거야 책은 불타도 물먹어도 죽는 것이 아니래 아무리 헐어도 다시 태어난다는 거야 책과 요정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거야 


헌책만 취급하는 이유가 있어? 물었더니 사연 없는 책은 재미가 없대 누군가가 책을 펼치는 순간, 그것이 설령 실수라 할지라도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거야 실수임을 깨닫고 곧장 책을 덮어버려도 그 순간이 이야기가 된다는 거야 지루한 이야기도, 싱거운 이야기도 이야기니까 


헌책 요정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에 대해 물었어 손때가 많이 묻은 책, 출간된 지 몇 세기가 지난 책, 세계 이곳저곳을 떠돌다 돌아온 책이라고 답할 줄 알았어 헌책 요정은 따끈따끈한 새 책을 가장 좋아한대 헌책이 될 가능성이 이제 막 생긴 책이니까 듣는 순간, 뜨끔했지 


헌책 요정이 떠나고 새날이 밝았어 새날도 곧 헌 날이 되겠지 헛날은 아니니까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겠지 할 말이 없어도 그게 또다시 이야기가 되겠지 불타도 물먹어도 누군가가 기억하는 한, 헌책의 이야기는 낡지 않겠지 요정이 영영 늙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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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시인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