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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2

SPECIAL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 아날로그의 레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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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레트로

 

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Emotion Icon영화학 박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필자가 영화와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는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4년쯤 전부터 힙플에 살게 되었다. 망원시장, 서교동은 물론 한강공원이나 연남동도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이다. 30년 이상 아파트촌에 살다가 주택가와 사무실, 상권이 섞여 있는 동네에 살게 되니 처음에는 신기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집을 나서면 바로 카페와 편의점, 맛집들이 즐비하고 미팅이나 약속을 잡을 때도 멀리 나갈 필요가 없어 좋다.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분위기가 서울의 다른 지역과 다른 것도 삶의 질을 높여준다. 건물 자투리 공간에 들어서는 카페 하나에도 개성이 묻어나고, 출판사 및 공방, 음악 작업실 등이 많아 창조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만족도 높은 동네에 살면 고급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부럽지 않다. 

유동 인구 중 10대부터 30대까지 젊은 세대와 외국인 관광객들의 비중이 높은 동네라 처음에는 문화충격도 있었다. 예약이 안 되는 맛집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열정도 놀라웠지만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할인에 들어간 모텔 앞에도 그만큼 줄이 긴 것을 보고 세월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산책 겸 정처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패션이며, 문화, 먹거리 등에 대한 트렌드가 절로 읽힌다. 탕후루, 히메컷의 유행을 먼저 알게 된 것도 동네 덕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중들의 취향 속에는 스치듯 반짝하고 사그라드는 유행도 있고,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는 유행도 있는데, 즉석 사진관의 등장은 후자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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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후루는 과일에 설탕 시럽을 굳혀 먹는 중국 음식이다. 

탕은 설탕, 후루는 박을 뜻하는데, 과일을 꼬챙이에 꿴 모습이 호리병박과 비슷하게 생겼다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2019년경, 처음 이 시장을 선도한 ‘인생네컷’이 등장하고, 코로나가 사그라들면서부터 셀프 즉석 사진관은 우후죽순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동네에서 작은 사거리의 각 코너마다 다른 브랜드의 셀프 즉석 사진관들이 포진해 있는 곳들도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찍은 사진들을 보관할 수 있는 사진첩도 문구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만큼 시장의 규모는 커졌다. 사실, 사진을 찍기 전 착용할 수 있게 가발이나 액세서리가 구비되어 있는 것부터 결과물까지, 과거 스티커 사진관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스티커 사진기 시절에는 카메라 달린 핸드폰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지금은 누구나 돈 안 들이고 셀카를 찍을 수 있는데, 거의 사라졌던 문화가 왜 다시 유행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레트로의 시대에 핸드폰 셀카 찍기가 식상해지기도 했고, 친구와 연인이 만나서 추억을 남길 수 있는 하나의 유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든 물리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을 선호하는 문화가 다시 돌아왔다는 점은 아날로그형 인간인 나에게 꽤 고무적인 일이다. 그래서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볼 때처럼, 조금은 추억에 잠겨서 즉석 사진관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곤 한다. 그들의 손에 들려 나올 셀룰로이드 필름 모양의 사진을 상상하면서. 

 

Emotion Icon ‘네컷 사진’이 유행하기 전 ‘스티커 사진’이 있었습니다!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볼 때의 느낌도 유사한 것 같다. ‘응답하라’ 시리즈 이후 소위 추억팔이용 콘텐츠들이 쏟아져나왔는데,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영화가 〈건축학개론〉(감독 이용주, 2012)이다. 90년대 중반의 대학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는 CD플레이어, 유선이어폰, 삐삐 등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기, 그러니까 마지막 아날로그의 시대에 우리가 향유했던 기기들이 등장한다. ‘승민’(이제훈)과 ‘서연’(배수지)의 연애 아닌 연애에도 그것들은 중요한 매개가 되는데, 특히 서연이 승민에게 CD를 통해 소개해 주는 〈기억의 습작은 비중 있게 사용되어 영화가 개봉한 2012년도에 다시 한번 큰 인기를 끌었다. 90년대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던 세대들에게는 이 음악이 그때, 다시, 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건축학개론은 스무 살의 승민과 서연이 10년 후 재회해 대학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그것은 곧 이 영화를 관람하는 30대 이상의 관객들이 자신의 20대를 돌아보는 의식의 흐름과 닮아 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포스터 카피처럼, 풋풋했던 시절이 없었던 사람은 없고, 그 시절의 추억 하나 없는 사람도 없기에 이 영화는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Emotion Icon 건축학개론 〉 - 〈기억의 습작 MV 

 

 

한편, 승민과 서연이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만났던 1996년의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좀머씨 이야기》(파트리크 쥐스킨트), 아버지(김정현), 축제(이청준), 천년의 사랑(상)(양귀자) 등의 소설이 포함되어 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장승수)와 같은 에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한우림) 등의 실용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앞단에 있는 순수문학 작품들이 더 눈길을 끈다. 순수문학에 대한 수요가 있었던 때라니, 생생했던 90년대의 추억들이 별안간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다. 지금 출판 시장에서는 부동산, 주식, 자기 계발 등의 키워드를 벗어나면 손해를 본다는 것이 정설이니까. 그런 맥락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좀머씨 이야기가 올라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1996년의 독자들은 텅 빈 배낭을 매고 호두나무 지팡이를 쥔 채 끊임없이 걸으며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좀머씨에게서 삶의 방식을 배우려 했다. 더 복잡해지고, 더 바쁘게 살아야 하고, 더 경쟁적이 되어가는 세기말적 혼돈 속에서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좀머씨 같은 롤모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좀머씨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고 은둔하는 삶의 가치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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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편의 동화 같은 소설 《좀머씨 이야기》는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드는 매력을 품고 있다. 

 

개인적으로 배경이 21세기로 넘어온 복고 영화는 별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미 일상의 상당 부분이 디지털화된 후라 지금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리라. 더 많은 시간이 흐른다면 모르지만, 아직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싶은 레트로에는 아날로그가 전제되어 있다. 서연과 승민이 〈기억의 습작을 MP3 플레이어로 들었다면 이야기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고 정서적인 효과 또한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레트로는 아날로그다. 다시 즉석 사진관이 사라진 어느 미래의 디지털 네이티브들도 복고 영화 속 즉석 사진을 보는 날에는 지금 내 마음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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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그런대로 행복한 영화 호사가

지금은 문화 전반에 관해 얘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만들고 있다.

여행 에세이집 《세도시 이야기》(공저), 짧은 소설로 릴리 이야기를 썼다.

 

 

 

 

 

섬네일 : 영화 〈건축학개론〉(2012)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67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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