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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2

BOOK&LIFE

[SIDE A]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연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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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연의 맛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나는 특히 가족, 그중에서도 아빠가 그랬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엄마와는 달리, 많은 부녀지간이 그렇듯 아빠와는 다소 서먹해서였다. 나의 경우엔 많이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까지 닮아서 더욱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인정받기를 원했다. 취미로 공연을 좋아하다가 직업이 된 후, 부모님과 함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를 본 적이 있다. <맨 오브 라만차>는 스페인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2010년이던 당시에도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이다. 자신이 세상을 구하는 기사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이야기는 상당히 이상적이고 때로는 허무맹랑했지만, 그래서 좋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했으니까. 상대적으로 공연 관람의 기회가 적은 부모님도 그 매력을 함께 느껴주길 바랐다. 30년 공직 생활의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았던 그때, 아빠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아빠의 기립박수는 긴 여운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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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맨 오브 라만차> ⓒ오디컴퍼니


무엇이 그 짧은 순간을 여전히 기억하게 하는 걸까. 내가 그랬듯, 아빠 역시 420년 전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레트로’가 과거의 현대적 재해석을 의미한다면, 그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매체는 단연 공연예술일 것이다. 공연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의 무대에서 실제 숨 쉬는 배우가 인물과 상황을 재연함으로써 이야기를 눈앞의 사건으로 만드는 예술이다. 기원전 458년에 쓰인 가족의 이야기도, 러시아 혁명의 이야기도 무대에서는 다 지금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오”라는 대사는 17세기의 글이자 21세기의 말이 된다. 그래서 현대의 창작진은 종종 고전에서 현재와의 접점을 찾아 새로운 질문을 도출해낸다. 권력을 얻기 위해 손에 피를 묻혔던 맥베스 부부의 이야기(《맥베스》)가 아이비리그 입학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등학생 이야기(<피어리스: 더 하이스쿨 맥베스>)로 탈바꿈되며 청소년과 인종의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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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피어리스 : 하이스쿨 맥베스> ⓒ장호


동시에 공연예술에는 날 것의 에너지와 감정이 있다. 스크린이나 편집과 같은 중간 과정 없이 관객과 배우가 ‘대면’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2010년에 배우 이순재가 출연하는 동명의 연극으로도 소개됐다. 당시 70대였던 이순재는 150분간 수많은 독백을 무대에서 쏟아냈다. 이상을 좇는 돈키호테와 배우 이순재가 쌓아온 세월이 더해져 무대는 묘한 환상으로 가득했다. 어부 노인의 사투를 판소리와 소리꾼에 빗댄 이자람의 창작판소리 <노인과 바다>도 인물과 퍼포머의 일체감으로 특별해진다. 이처럼 배우들의 발화를 통해 구체화되는 인물의 성격과 문장의 맛이 공연예술에 있다. 유명하지만 아직 읽지 않은 문학을 고전이라고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공연예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재해석으로 오래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한다. 고전이 지루하고 어렵고 낡은 시선을 가졌다고 짐작한다면, 공연으로 시작해보자. 생각보다 훨씬 더 재밌는 체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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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착판소리 <노인과 바다>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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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
 
17년째 공연예술에 대해 쓰고 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창작자와 관객 사이의 빈 곳을 찾아내 긴밀히 잇는 작업을 선호한다.
<클래스101>에서 ‘공연예술 글쓰기’ 강의를 진행했으며,
다양한 매체에서 공연예술의 매력을 소개하고 있다.
 
 
 
 
 
 

섬네일 : 연극 〈돈키호테〉 © 머니투데이, <77세 이순재, 풍차로 돌진하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2011203124998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