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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0

BOOK&LIFE

[SIDE A] 만년필 수리공이 전하는 몰입의 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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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수리공이 전하는 몰입의 이로움

 

김덕래

만년필 수리공

 

 

 


시간은 견줄 대상조차 없으며, 존재하는 것 중 가장 유한한 자원입니다. 그러니만큼 귀하게 써야 하지만, 무조건 빠른 것만이 절대적인 궁극의 가치는 아닙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야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는 것처럼, 더디게 해야만 제대로인 일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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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은 꽤 특수성이 있는 필기구입니다.

같은 반 학생 스무 명이 주욱 늘어서 있을 때, 키와 체중, 얼굴 생김새나 목소리, 성격 등 모든 점이 다 다르지만, 같은 반 동급생이란 사실은 분명하지요? 만년필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모양새와 색깔이 조금 다를 뿐, 다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한 자루 한 자루의 맛과 멋이 달라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펜촉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도 정도를 넘게 가까우면 자칫 실수하기 쉽고, 또 너무 오래 안 봐도 사이가 멀어지기 쉬운 것처럼, 만년필도 그렇습니다. 슬릿(Slit ; 펜촉 한가운데 잉크가 지나가는 통로) 간격이 과하게 좁혀져도 잉크가 제대로 못 흐르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벌어진 상태여도 문제가 됩니다. 사람도 만년필도 적당한 거리두기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때때로 말썽을 부리는 꽤 성가신 쓸 것이긴 합니다만, 만년필 제조사들의 기술력은 상향 평준화된 지 오래입니다. 1883년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Lewis Edson Waterman)에 의해 만년필 시대의 대서막이 열렸습니다.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고,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의 아버지로 회자되는 것처럼, 워터맨은 만년필의 아버지인 셈입니다.

 

(사진 1)최초의 만년필 제조사 워터맨(Waterman)의 스테인리스 스틸 펜촉.jpg

▶ 최초의 만년필 제조사 워터맨(Waterman)의 스테인리스 스틸 펜촉 ©김덕래

 

만년필의 발원지는 미국 뉴욕이지만, 현 만년필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는 이견 없이 독일입니다. 이탈리아와 일본이 그 아래에서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잡고 있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 같은 꽤 굵직한 나라들이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있으며, 중국이나 대만, 튀르키예 같은 후발주자들이 틈새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형국입니다.

 

(사진 2)독일을 비롯해 동서양의 여러 제조사에서 생산한 다양한 만년필.jpg

▶ 독일을 비롯해 동서양의 여러 제조사에서 생산한 다양한 만년필 ©김덕래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이어가며 꾸준히 신제품을 내놓는 만년필 업체가 10여 곳이 훨씬 넘는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대상을 만년필로 한정하지 않고, 연필이나 샤프 같은 필기구로 확장하면 업체 수는 더 늘어납니다. 그 맨 앞에 있는 파버카스텔은 1761년 문을 열어 올해로 262주년이 됩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구회사인 만큼, 필기구의 할아버지로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만년필은 이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개선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기술적으론 완숙 단계에 도달한지 오래라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다루기 어려운 필기구란 인식이 있는 까닭은, 다분히 만년필 펜촉만의 특성 때문입니다. 볼펜이나 수성펜 같은 필기구는 심 끝에 볼이 달려있습니다, 손에 힘을 주면, 그 볼이 구르며 내장된 잉크를 밖으로 나오게끔 하는 구조입니다. 다루기도 쉽고 방향성이 없어, 사용자가 어떻게 쥐고 쓰더라도 촉 끝이 종이에 닿기만 하면 써집니다.


만년필은 경우가 다릅니다. 어떤 각도와 방향으로 쥐고 쓰느냐에 따라 잉크가 기가 막히게 잘 나오기도 하고, 반대로 흐름이 뚝뚝 끊기기도 합니다. 여기에 필압과 쓰는 속도, 보관하는 환경이나 잉크라는 변수까지 더해지면 경우의 수는 더 늘어납니다. 이렇게만 보면 더없이 성가신 도구인데, 이런 예민한 성질과 까다로운 특성이 되레 만년필에 더 깊게 빠지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요?


아무리 숙련된 전문가가 만들고 특성을 잘 아는 사용자가 다루더라도, 쓰다 보면 문제가 생기는 게 만년필입니다. 만년필은 거실장에 넣어놓고 눈으로만 보는 장식품이 아니라, 펜촉을 종이에 대고 쓸 때 제 몫을 다하는 필기구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사람이 쓰는 도구인데, 완벽한 상태가 평생토록 유지된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이겠지요.

 

(사진 3)잉크가 주입된 상태로 오래 사용하지 않아 문제가 생긴 펜촉을 살려내는 과정.jpg

▶ 잉크가 주입된 상태로 오래 사용하지 않아 문제가 생긴 펜촉을 살려내는 과정 ©김덕래

 

처음부터 이 일을 꿈꿨던 건 아닙니다. 그저 시간을 쓰면 살려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펜이 버려지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어쩐지 수명이 아직 남아있는데, 예상 못 한 사고로 생명이 끊기는 것만 같았어요. 그렇게 한 자루 한 자루 손보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펜을 고쳐내니 펜닥터라고들 부르지만, 저는 만년필 수리공이란 말이 더 듣기 편합니다.


내가 구입한 펜이 망가지면 속상한 정도로 끝나니 차라리 다행입니다. 지인에게 선물로 받은 펜이 고장 나면 그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유품 같은 귀물을 떨궈 심각한 상태가 되면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스멀스멀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오면, 돌이킬 수 없음을 자책하게 됩니다. 그러니 고장 난 만년필 한 자루를 살려내는 건, 누군가의 상처 입은 마음을 보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만년필을 잘 고칠 수 있는지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뇌는 부정의 개념이 없다고 해요. 고칠 수 없어 보인다… 생각하지 않고, 꼭 고칠 수 있다… 생각하면 길이 보입니다. 관점을 바꾸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거짓말처럼 가능해진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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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손봐진 1950년대 몽블랑 빈티지 252 만년필 ©김덕래

 

《채근담》은 16세기 중국 명나라 말기인 1580~90년대경, 홍자성이란 인물이 쓴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양의 탈무드와 쌍벽을 이루는 동양 최고의 지혜서로 불리는 책답게 곱씹을만한 글들이 차고 넘치는데,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쉬워 보이는 일도 해보면 어렵다. 못할 것 같은 일도, 시작해놓으면 이루어진다.”


내 마음밭에 심어도 좋을 만큼 가치로운 일을 찾는 건 몹시 중요합니다. 누군들 처음이 없었으려고요. 누구나 작은 텃밭에서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고랑을 파고 이랑을 넓히는 과정에서 손에 굳은살이 붙고 안목이 커져가는 게 이치입니다. 그런 수순을 거쳐야만 밭이 넓어지는데, 그 과정이 녹록할리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일에 진심을 담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일을 찾아내는 게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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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책보고 동신서림 서가에서 판매하고 있는 《이야기 채근담》(손풍삼, 고려원미디어, 3,000원),

《탈무드》(마빈 토케어, 지성문화사, 2,000원)

 

만년필 수리는 누구나 시도할 수 있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끈기가 필요합니다. 몇 시간 안에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며칠 밤낮을 써도 증상이 전혀 나아지지 않거나, 거꾸로 상태가 더 나빠지기도 하니까요. 그런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쉽지 않은 게 어쩌면 당연하다…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느긋해집니다.


과몰입의 사전적인 뜻은, 정도를 넘어서 과하게 집중한 상태를 말합니다. 과하단 말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 잘못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만, 미칠듯한 즐거움처럼 원래의 말뜻을 강조한 표현으로 봐야 옳습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무언가에 빠지지 않고도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중한다는 건, 거죽만 훑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해 작으나마 성과를 내고, 그걸 바탕으로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내딛는 행위는 찐몰입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달릴 때 몸 안에서 솟구치는 유쾌한 감정을 러너스 하이라고 합니다. 또 풀기 힘든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심장이 요동치며 짜릿한 기분이 온몸에 퍼집니다. 고장난 만년필을 살려내면, 그에 못지않은 행복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몰입하지 않고선 절대 그 맛을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다디단 열매입니다.


어쩌면 만년필 수리공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직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디지털화가 점점 더 가속화될 게 자명하기에, 여태까지보다 앞으로 더 주목받는 직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들, 사람의 몸 자체는 아날로그니까요.


미래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2030년까지 현존하는 직업의 절반가량이 사라질 거라고 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는 직업과 뜨는 직업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수많은 직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분명 새로이 생겨나는 직업도 있을 겁니다. 또 제가 하는 이 일처럼, 이미 멸종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업종도 있다는 걸 알게 되겠지요.


진주에서 헌책방인 ‘소소책방’을 운영하는 조경국 작가(편집자 코멘트_서울책보고 웹진 11호의 필자입니다. 해당 웹진 글 바로가기)  역시 보기 드문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헌책방지기인 그와 만년필 수리공인 저는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어요. 그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일상의 많은 것들을 귀히 여기며, 글쓰기에도 열정적입니다. 7년 전 《필사의 기초》라는 책을 냈는데, 문구에 대한 애정이 담뿍 묻어있습니다. 필사의 이로움에서 시작해, 독서의 필요성을 거쳐, 내게 맞는 필기구를 택하는 나름의 요령까지 쉽게 풀어놔 가볍게 읽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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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진주 소소책방에서 헌책방지기인 조경국 작가와 함께한 만년필 수리공 ©김덕래

 


2019년 《쪽지종례》라는 책을 펴낸 이경준 작가는 현역 국어교사면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 역시 평범하지 않습니다. 매주 학생들에게 진심을 담아 한 장 가득 편지를 쓰고, 그걸 금요일 종례시간에 나눔 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이런 선생님에게서 배우는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할 것이며, 학부모들은 또 어찌나 든든할까요? 매체마다 경쟁하듯 무겁고도 날카로운 소식을 쏟아내는 요즘입니다. 서로 경계하거나 헐뜯지 않고도 상생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이런 선생님이 좀 더 많은 세상을 꿈꿉니다.


만년필 수리공, 헌책방지기, 시인 교사. 

하는 일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진심을 다해 사는 건 같습니다. 한 문장을 어떻게 띄어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듯이 살다 보면 내 삶의 주도권이 나도 모르는 새 남에게 넘어가버리고 맙니다.


프레임에 담고자 하는 피사체가 너무 멀리 있을 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멀리서 망원렌즈로 당겨 찍는 것과, 좀더 가까이 다가서서 셔터를 누르는 것입니다. 멀찌감치 떨어진 상태에서 보면 전체적인 형편을 파악할 수 있으니 관망에 해당됩니다. 한발 다가서면 그만큼 대상에 근접할 수 있으니 집중에 속합니다. 형세를 두루 살펴야 할 때가 왜 없겠습니까만, 감동을 주기 위해선 다가서야 합니다. 과몰입 시대를 직진으로 뚫고 나아가는, 이른바 찐몰입 세대를 도처에서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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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래

만년필 수리공

 

 

한국에 몇 안 되는 만년필 수리공입니다.

여태 만 자루가 넘는 만년필을 손보는 과정에서 수천 명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만큼의 손 편지를 써 보냈고, 적지 않게 받은 답장을 보물처럼 아낍니다.

오마이뉴스와 인연이 닿아 3년 반 동안 〈김덕래의 만년필 이야기〉를 연재해왔습니다.

그 글을 엮어 2022년 12월 《제 만년필 좀 살려주시겠습니까?》라는 책을 냈습니다.

출간 이후 북토크나 강연 같은 외부 일정에 더불어, 만년필 수리공에 대한 다큐 영상물을 찍고 있습니다. 

펜닥터D의 수리공작소(바로가기)〉를 운영하며, 나라 안팎에서 보내오는 만년필을 고치고, 그 사연을 글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