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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8

INSIDE

[서울책보고 직원이 요즘 읽는 책] 《파묻힌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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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책보고 직원이 요즘 읽는 책


《파묻힌 여성》 

마릴렌 파투-마티스, 프시케의숲, 2022 

기획홍보팀 P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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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책을 읽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내 눈길이 가고 내가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읽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을 추천받아 새로운 세계와 조우할 수 있으니까. 이 책도 그렇게 만난 책이다. 출판사에서 마케터로 일하는 다독가 친구가 추천해준 프랑스 선사학자가 쓴 젠더 고고학 분야의 책. 고고학이라니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하고 읽어 내려가다가 선사시대 여성을 향한 몽상적인 시각부터 선사학의 등장 배경, 선사시대 여성에 관한 새로운 해석, 그 해석에 걸맞게 저항의 역사를 만들어온 여성들의 이야기까지 논리 구조와 구성이 완벽한 책이었다. 촘촘하게 논리를 쌓아가다가 마지막에 정말로 하고 싶은 메시지를 유려하게 펼쳐내는 솜씨란! 최상급의 독서 쾌락이 밀려왔다. 책의 5분의 1이 각주일 정도로 주장의 근거가 탄탄한 인문학 서적을 읽는 기쁨은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 불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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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어떤 지식의 전제 혹은 내용 자체가 실은 시대적 한계 속에 탄생한 편견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가령, 선사시대 여성이 동굴 안에서 양육에 집중하고 집안일을 하는 의존적이고 수동적 존재며, 남성은 창의적으로 수렵과 채집에 나섰다고 볼 수 있는 확실한 인류학적 근거는 없다는 점이 놀라웠다. 

 

“구석기시대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낮았다는 가설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자료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가부장제 시대의 관점에 선사시대 여성들은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여성에 대한 이런 왜곡된 시선을 고착화한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면밀하게 살피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에 놀라는 한편 고대 그리스로부터 2020년대까지 이어지는 여성을 향한 끈질긴 편견의 역사를 마주하는 일은 조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구석기 시대 조각품인 비너스를 통해 예술가이자 제사장으로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새롭게 들여다본 저자의 시도는 희미한 희망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지난한 편견을 딛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여성의 저항 역사의 기술은 그 절망을 뛰어 넘는 비전을 보여주기도 했고. 

 

양질의 인문학 서적을 읽고 내가 처한 자리를 조망하며 인류가 만들어온 역사를 들여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정밀하게 에너지를 쏟아 지식을 연마하고 양질의 책을 쓰는 사람 그리고 그 책을 골라 읽는 사람은 역시 질문을 가진 사람들이며 세계가 늘 변화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고. 그런 사람들이 이런 책을 쓰고 읽는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