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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8

SPECIAL

[오은의 오늘의 시] 헌책_준비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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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준비하는 마음

 

 

                      오은


 

 

회사의 준비실에는 작은 책장이 있다


작은 책장에는

몇 권의 책이 꽂혀 있다

건축 옆에는 피아노, 피아노 옆에는 화초, 화초 옆에는 시, 시 옆에는 바둑, 바둑 옆에는 경제사, 경제사 옆에는 컴퓨터 활용 능력, 컴퓨터 활용 능력 옆에는 바다 생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책들

다른 책에 곁을 내주지 않는 책들


작년에도 올해에도

책장의 크기는 바뀌지 않았다

꽂혀 있는 책도 늘어나지 않았다

책의 배열마저 그대로다


책 내용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아무도 책장에 손대지 않는다


지칠 때마다 

바다 생물 도감을 펼친다는 걸

회사 사람들은 모른다


수영을 못해도

나는 바다에 간다

그때마다

어지러운 머릿속이

신비로운 바닷속이 된다

 

바다 생물 옆이 비어 있어서

상상하기 좋다


바다를 떠올리다

순식간에 여름이 소환되고

기다렸다는 듯 수박을 아싹 베어 문다

군침이 돈다


준비하는 마음은

절대 닳지 않아서


발밑의 모래

손끝의 소금기와 함께 


여름이 올 때까지

상상은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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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시인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