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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5

SPECIAL

[개관 4주년] 서울책보고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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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4주년

서울책보고와 나

 

김은진

시민 작가

 

 

 

 

주여 가을이 왔읍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읍니다…


서울책보고에서 산 신영출판사의 1984년 판 《장미의 기도》에 있는 시 〈가을날〉을 읽는다. 고풍스러운 세로 읽기 책에는 시와 함께 아름다운 가을 풍경과 흑백의 그림들이 담겨 있다. 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 이런 오래되고도 아름다운 책들을 보면 나는 마음이 포근해진다. 내가 헌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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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판 《장미의 기도》에 있는 시 〈가을날〉 © 김은진

 

코로나 시국에 나의 직장인 영화관은 그야말로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내가 있던 영화관은 한때는 아르바이트생들 100여 명이 근무하던 곳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관객이 급감하면서 20명도 안 되는 적은 인원만 남기고 모두 떠나가 버렸다. 

 

코로나의 기세가 한창이었던 그날 아침에 나의 파트너는 20대 중반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평상시에는 서비스업에 맞지 않는 뚱한 말투와 태도를 가진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혹시나 이 친구가 오늘 늦잠이라도 잤다면 이 큰 영화관을 나 혼자 지킬 뻔했는데 무사히 출근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관에서 제법 오래 일했지만, 현장 일은 많이 해 본 적이 없는 탓에 모든 것이 서툴렀다. 관객이 많지 않아도 매점과 매표를 오가며 늘 혼자만 분주했다. 코로나 초기, 개봉 예정이었던 기대작 영화 한 편이 개봉을 계속 연기하고 연기하다 결국 극장 상영을 포기하고 넷플릭스로 떠난 일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극장에서 근무하던 많은 사람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제 영화관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입사한 다음 해부터 극장가에는 천만 영화들이 쏟아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영화관 로비로 쏟아지던 수많은 사람.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고, 그렇게 숨을 쉴 틈 없이 바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영화관이 한가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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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관객으로 가득 찼던 극장이 한가한 모습으로 변해버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매표소에 오신 한 할아버지가 나에게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시며 좀 보다가 재미없으면 다른 상영관으로 옮기겠다 하시길래 안된다 했더니 대뜸 욕이 날아온다. 이 시국에 와줬더니 고마운 것도 모르고 라는 논리다. 갑자기 욕을 먹고 기분이 안 좋은 찰나에 매점 쪽에서 치이익 하고는 뿌연 연기와 함께 탄 냄새가 난다. 아까 새로 튀긴 팝콘이 다 타버린 것이다. 하지만 신세 한탄할 시간이 없다. 지금 중요한 건 빨리 팝콘 기계를 닦아서 팝콘을 다시 튀기는 것이다. 아르바이트생과 낑낑대며 기계를 내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화가 난 듯한 한 아줌마가 나를 보면서 걸어온다.

"아니, 지금 영화 시작했는데 왜 소리가 안 나요?"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하며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얼굴을 하고는 상영관으로 뛰어간다. 

머릿속으로는 오늘 퇴근하고 집에 가면 꼭 구직 사이트와 미래 유망 자격증 정보를 뒤져보고 자야겠다고 다짐한다.

 

 

몸도 마음도 지친 긴 하루가 끝나고 나는 집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서울책보고로 향했다. 여러 개의 헌책방이 모여 있는 공공헌책방 서울책보고. 나 같은 헌책 덕후들의 마음을 늘 설레게 하는 곳. 4년 전 처음 방문하여 보았던 아름다운 <앤틱북 특별전>을 시작으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서울책보고를 찾는다. 서울책보고의 아치형으로 된 내부를 지날 때마다 나는 마치 헌책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곤 한다. 과거의 추억일 수도, 미래의 꿈일 수도 있는 새로운 세상. 그날 나는 어릴 때 보던 디즈니 동화책을 샀다. 그 책을 본 순간 나는 바로 아무 걱정 없고 마냥 행복했던 나의 국민학생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그 위를 동생과 함께 뒹굴뒹굴하며 디즈니 만화 동산 같은 TV만화나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만화 테이프를 보고 명랑소설, 새소년, 보물섬 등을 읽으며 보냈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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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동화책 《미키의 크리스마스》 © 김은진

 

헌책 안에는 그 책을 쓴 작가뿐 아니라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의 추억들까지 그대로 다 담겨 있다. 그 추억이 길고 긴 시간을 지나서 헌책방을 통해 나에게로 또 이어진다. 책 한 권으로 나는 또 행복해진다. 집에 가면 이 책과 함께 지난번에 서울책보고에서 사둔 만화잡지와 빨간색 해문출판사의 아가사 크리스티 책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많은 동료가 떠난 곳에서 계속 일하면서 늘 고민이 됐었다. 영화관의 미래는 이제 없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나 역시 떠나야 하는 걸까 하고. 그리고 코로나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관객들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요즘의 영화관을 보며 나는 다시 생각한다. 이제 걱정하고 고민하는 일은 그만 멈춰야겠다고.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현실을 갑작스레 마주했듯 세상이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 잘 모르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어디로든 흘러가고 또 어떻게든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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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세계의 동화》 © 김은진

 

서울책보고의 한 모퉁이에 서서 계몽사의 어린이 세계의 동화 속 예쁜 삽화를 감탄하며 보고 있는 나에게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다가와서 말을 건다.

“이 책들 진짜 너무 최고지 않나요?“ 

그 아저씨의 손에는 이미 그 시리즈의 책 두 권이 들려 있다.

“네, 최고네요. 진짜! “ 

 

 

넷플릭스 같은 OTT 시장이 지금보다 더 커진다 해도 영화관이 영영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큰 스크린과 웅장한 사운드의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계속 존재하는 한 말이다. 마치 전자책이 나왔어도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서울책보고에서 마주쳤던 그 아저씨와 나처럼 종이책을 사랑하고, 종이책에서 기쁨과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 늘 있는 한. 다음 주에는 시간을 내서 서울책보고에 방문해보려 한다. 운이 좋으면 어릴 때 보던 추억의 책이나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 혹은 좋아하는 작가의 숨겨진 책을 찾는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서두르는 사람이 없는 여유로운 헌책방에서 나 역시 천천히 나만의 보물을 찾아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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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책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