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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5

SPECIAL

[헌책보고 고전보고] 시작, 그리고 쌓아 나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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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보고 고전보고> Ep. 15

시작, 그리고 쌓아 나가기

 

키두니스트(Kidoonist)

웹툰 작가,  편식하는 독서가

 

Emotion Icon<헌책보고 고전보고>는 헌책과 고전문학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이며,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서울책보고가 개관한 뒤로 4년의 세월이 흘렀다. 4년만큼의 시간이 낡은 책더미 위를 뒤덮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어떤 시작점 위에 수많은 사건이 겹겹이 쌓인다는 뜻인데, 묘하게도 이는 책의 줄거리와도 닮아있다. 가상의 줄거리를 풀어나가는 문학에서 더더욱 그렇다. 모든 문학은 탄탄한 시작점을 두고 그 위에 재기발랄한 서사를 쌓아 나가기 때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문학 이야기를 하는 일은 드물지만, 그 와중에 주기적으로 나오는 주제도 있다. 바로 고전문학의 첫 문장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제목만 아는 여러 문학작품의 첫 문장만 따놓은 게시글은 항상 인기 만발이다. 그 목록을 보자면 명작은 괜히 명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문장이 더없이 말끔하면서도 앞으로의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방인》의 첫 문장은 주인공 뫼르소의 냉정하고 무기질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은 등장인물들이 살아간 격동의 시대를 단번에 요약한다. 논란의 도서 《롤리타》의 첫 문장은 주인공 험버트가 바라보는 롤리타의 이미지를 미려한 문장으로 형상화하며,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은 해당 작품이 독신남과 그 배필에 관한 이야기임을 단호하게 알려준다. 해당 게시글을 본 사람들이 직접 그 책을 읽어주면 더 좋겠지만 그건 지금은 논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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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프랑스 원서, 알베르 카뮈 (열린책방/ 각 40,000원) 



이렇듯 우리가 한 번쯤 들어본 문학은 저마다 멋들어진 첫 문장, 즉 시작을 지니고 있다. 물론 끝 문장이 보잘것없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이야기를 완결짓는다는 점에서 더욱더 압축적이고 여운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개 첫 문장에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 이유가 무엇일까? 완독까지 해야 비로소 볼 수 있는 마지막 문장과 달리, 첫 문장은 한 장만 들추면 바로 보여서? 끝 문장은 이전까지의 줄거리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어서? 그것도 무시하지 못할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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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두니스트 Kidoonist

 

그러나 정말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첫 구슬을 꿰는 것이 모든 이야기의 필요조건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모든 일의 끝이었다.' 보다는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에 더욱 흥분한다. 더욱 생기를 느끼고 희망을 느낀다. 앞으로의 모든 시간이 이제부터 펼쳐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완벽한 글이 주제인 책,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서는 '이 순간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가 가장 중요한 문장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처음, 시작이란 많은 이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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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두니스트 Kidoonist


이제 시작이 있으면 쌓아 올릴 전개도 있어야 한다. 헌책방의 책들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많은 것들을 쌓아 올렸다. 내적으로는 책의 내용을 쌓았다.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조심조심 쌓아 이미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다. 외적으로는 그 책이 견뎌온 세월을 쌓았다. 처음 인쇄되어 나온 젊은 책은 간데없고 종이가 누렇게 바랜 늙은 책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헌책이 가득한 서울책보고 또한 이미 4년이라는 세월을 쌓았으며 앞으로는 더 많은 세월을 쌓을 것이다. 다만 1년에 한 번씩 생일이 돌아오며 한때 시작이 있었음을, 그리고 또 한 해의 세월을 쌓았음을 자명종처럼 알려줄 뿐이다. 책보고 안은 언제나처럼 조용하겠지만, 알게 모르게 변화하는 책들이 시간의 흐름을 나지막이 알려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번 주말에는 낡은 책들을 첫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보려 한다. 누가 알겠는가? 내 인생에 새로운 세월을 쌓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줄지.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재미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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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책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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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두니스트(Kidoonist)

웹툰 작가, 편식하는 독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 문학, 그중에서도 장르 문학 위주로 읽는 습관이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40여 권의 책을 만화로 리뷰했으며 누적 조회 수 80만 회를 기록했다. 

수입의 상당 부분을 책 사는 데에 쓰고 있으며 언젠가 개인 서재를 갖고픈 꿈이 있다. 

현재는 좁은 공간에서 SF와 추리물, 그 외 장르를 어떻게든 분류하고 있다. 

영국 여행 중 셜록 홈즈 박물관과 해리 포터 스튜디오를 가봤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고전 리뷰툰》, 《고전 리뷰툰 2》를 지었다.

 

 

 

 

섬네일 : 《이방인》 일러스트판 표지, 책사랑 © 교보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069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