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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5

SPECIAL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 로맨스, 서점, 그리고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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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서점, 그리고 고양이

 

 

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Emotion Icon영화학 박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필자가 영화와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는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당신의 인생 로맨스 영화를 하나만 대보시라.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이터널 선샤인>? <노팅힐>? <러브레터>? <비포 선셋>? 대체 언제적 영화냐고? 흠, 고전은 나이 들지 않는 법. 그러나 10대, 20대 독자들을 고려해 <라라랜드>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어떨까.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런대로 로맨스 영화가 화두일 때 먼저 떠오르는 작품들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말해주려 한다. 언급된 작품들은 모두 서점이나 도서관과 관련이 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서점은 해리와 샐리가 5년 만에 다시 만나 친구로서 관계를 시작하게 되는 공간이고,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조엘이 서점에서 일하는 클레멘타인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노팅힐>의 윌리엄은 여행 전문 서점 주인인데 우연히 애나가 이곳에 들리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된다. <비포 선셋>은 파리의 아담한 서점에서 시작된다. <비포 선라이즈>의 경험을 책으로 써서 작가가 된 제시가 낭독회를 마치자, 마법처럼 셀린느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책은 두 사람을 심리적으로 이어주고, 서점은 9년 만에 두 사람을 물리적으로 만나게 해준다. <러브레터>에서는 두 명의 후지이 이츠키가 도서부로 봉사하게 되는데, 단둘만 있는 도서관은 미묘한 감정이 오가기도 하고, 여러 사건도 발생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두 십 대도 도서관에서 만남을 갖는다. 이 영화는 <러브레터>의 도서관 분위기를 많이 차용하고 있다. 그런데 <라라랜드>에도 도서관이 나오냐고? 사실, 건물만 살짝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에 세바스찬이 고향에 내려간 미아를 찾아내게 해준 것이 바로 볼더시티의 ‘델 프라도 공립도서관’이다. 미아가 집 앞에 도서관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므로, 떡밥에 불과한 <라라랜드>를 제외한다 해도, 귀납법에 의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는 지성과 감성이 공존한다는 것, 많은 이들이 이런 곳에서 로맨스가 시작되기를 꿈꾼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책이 쌓여 있는 곳은 더욱 소중하다. 일단 연애 상대가 생기고 나면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데이트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잠시 잊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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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이 운영하는 영국 런던의 작은 여행 서점에 헐리웃 스타 애나가 들어온다.  © 영화 <노팅힐> 중에서

 
아마 눈치가 빠른 독자들은 서점과 얽힌 매우 중요한 로맨스 영화 한 편을 일부러 빼놓았다는 사실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서점은 사랑이 시작되거나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는 공간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남자가 대형 프렌차이즈 서점을 열면서 여자가 대를 이어 운영하던 작은 서점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이렇게 심각한 대립 관계에 있는 두 남녀는 바로 <유브 갓 메일>의 ‘죠’(톰 행크스)와 ‘캐슬린’(멕 라이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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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유브 갓 메일> 포스터 © 다음영화 

 
때는 바야흐로 이메일이 대중화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도 <유브 갓 메일>의 원작인 1940년 작, <모퉁이 가게>에서는 주인공들이 손편지로 사랑을 속삭였으니, 불과 반 세기 만에 인류는 혁신적 발전을 이룬 셈이다. 죠와 캐슬린은 이메일로 뉴욕 예찬을 나누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 각자 애인이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은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기분이니까. 그런데 두 사람이 매일 메일을 주고받으면서도 상대방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를 유발한다. 죠는 대형 서점 ‘폭스 북스’의 사장으로 캐슬린이 운영하는 모퉁이 서점 근처에 개점하고, 온갖 물량 공세로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캐슬린은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서점을 지키기 위해 미디어를 동원해 맞서보지만, '폭스 북스'가 제공하는 카푸치노 향을 당할 재간은 없다. 고민을 거듭하던 캐슬린은 결국 문 닫을 결심을 하고 만다. 
 
이렇게 이 영화에는 끝과 시작이 맞물린다. 캐슬린과 남자친구가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면서 곧바로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라고 묻고, 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캐슬린은 자신이 일부를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면서도 ‘폭스 북스’에 들어가 세련된 인테리어와 그 안에 가득 찬 손님들을 본다. 42년 된 그녀의 가게는 추억으로 남게 되었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변함없이 이 거대한 보고(寶庫)에서 여기저기를 들추며 그날의 보물을 찾고 있다. 책을 보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과 웃음소리도 아동 서적을 전문으로 하던 캐슬린 가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폭스 북스'의 아동용 의자에 앉아서 캐슬린은 슬프지만, 현실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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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스 북스'를 방문한 캐슬린은 거대한 책 공간 가득한 밝은 사람들을 보며 슬프지만 현실을 받아 들인다.  © 영화 <유브 갓 메일> 중에서

 

한편, 전혀 다른 이유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서점과 그것을 막으려는 고양이가 나오는 판타지 소설이 있다. 본업은 의사라는 나쓰카와 소스케 작가의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라는 소설이다. 한 때는 동거묘가 있었으나 알레르기가 생겨 버린 현직 랜선 집사로서는 표지만 보고 바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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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는 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책을 좋아하나요?" © 네이버책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나쓰키 린타로는 서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자 린타로는 고모의 결정대로 서점을 닫기로 한다. 할아버지와 서점을 동시에 잃게 된 린타로는 슬픔 속에서 책을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어디선가 신비스러운 얼룩 고양이가 나타나 책을 지키기 위해서는 린타로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린타로는 고양이의 요청대로 다독하는 지식인, 속독법을 연구하는 독서연구소장, 팔리는 책만 만드는 출판사 등을 방문하며 진정, 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된다. 고양이의 카리스마를 제외하면 청소년층을 겨냥한 교훈적인 내용이라 대단히 흥미롭지는 않지만, 책을 대하는 세태를 비판적으로 응시하게 만드는 힘은 있다. 중요한 것은 린타로가 모험 끝에 서점을 닫지 않기로 결심한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서점은 이제 새로운 주인과 함께 다시 문을 연다. 
 
4년의 시간을 보내고 또 다른 1년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서울책보고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독자들의 열정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공간이 되리라 믿는다. 또한, 이곳에서 수많은 해리와 샐리가 조우하기를, 클레멘타인과 같은 스태프들을 만날 수 있기를, 제시 같은 작가의 낭독이 울려 퍼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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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책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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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그런대로 행복한 영화 호사가

지금은 문화 전반에 관해 얘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만들고 있다.

여행 에세이집 《세도시 이야기》(공저), 짧은 소설로 릴리 이야기를 썼다.

 

 

 

 

 

섬네일 :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포스터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0250#photoId=1139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