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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3

INSIDE

[세렌디피티] 《연인》을 펼치다 만난 연인들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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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dipity 
예기치 않은 메모나 물건을 발견하다
 
《연인》을 펼치다 만난 연인들의 메시지
《연인》에 적힌 편지
 
 

 

 

헌책 서가에서 발견한 어떤 헌책은 오로지 그 안에 적힌 메시지 때문에 소유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할 책이 바로 그런 책인데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중 한 권인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연인》(민음사, 2007)이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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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연인’이어서인지 이 책에는 연인 사이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어요. H님이 연인에게 책을 선물하며 간단한 메시지를 적어놓았는데요. 그 본격적인 메시지에 앞서 지금 연인이 읽으면 의미 있을 시 한 구절이 단정한 필체로 적혀 있었습니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 김명인 ‘침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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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선물에 시를 적어넣는 일. 이거 너무 1980~90년대 갬성 아닌가요? 하지만... 놀라지 마세요. 이따 공개되겠지만 이 메시지는 무려 2010년의 것입니다. 2010년에도 연인 사이에 책을 선물하고 시를 나누었다는 생생한 현장을 우리는 이 헌책에 적힌 메시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H는 왜 연인에게 이런 시를 적어 책을 선물했을까요?

 

 

당신의 ‘바라나시’로 떠나는 길목에

당신의 오랜 ‘연인’ 한O가,

2010. 1.21 日    

 

 

그의 연인이 인도의 ‘바라나시’로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바라나시? 흔하지 않은 여행지 이름에 문득 그곳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힌두교 최대 성지 중 한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갠지스강에서 ‘뿌자’라는 제사 의식을 지내는 인도인들을 볼 수 있는 신성한 도시 바라나시. 삶과 죽음이 공존하면서 힌두교와 불교 유적을 바라볼 수 있는 바라나시. 그곳으로 떠나는 연인의 뒷모습을 보던 H가 축복처럼 건네는 저 시의 한 구절은 비단 인도의 바라나시로 떠나는 이뿐 아니라 매일 길을 잃은 듯한 일상을 견디는 삭막한 도시인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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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김명인의 이 시 전문을 찾아보았습니다. 


침묵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 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_‘침묵’, 김명인, 『길의 침묵』(1999) 

 

 

구도자의 도시로 떠나는 연인에게,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자기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듣고 오라는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 뭔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무엇보다 이 메시지에 적힌 ‘연인’에 홑따옴표가 붙어 있다는 데에서 둘만이 공유한 시간의 특별함이 읽히고요.  

 

13년 전, 아마도, 인도의 ‘바라나시(Varanasi)’로 여행을 떠나는 연인에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선물한 감성이 빛나는 이런 책.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짧은 메시지 하나를 더 발견했습니다.   

 

한O가 나에게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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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 마음 다해 건네준 책의 뒤페이지에 기록을 남겨둔 이 헌책의 주인. 이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두 줄의 짧은 메모를 보고 마음이 심쿵 내려앉습니다. 이 책은 어떤 연유로 이렇게 헌책방까지 흘러들어왔을까 그 사연이 궁금해지면서요.

 

 

 

 

 

 

섬네일 : 영화<연인>(1992)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0741#photoId=934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