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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0

INSIDE

[세렌디피티] 시집 《메이비》에서 발견한 아마도 시 같은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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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와 아현동 방향을 알려주는 옛 표지판 © 경남영상자료관 
 
Serendipity 
예기치 않은 메모나 물건을 발견하다
 
시집 《메이비》에서 발견한 아마도 시 같은 메시지 
시집 《메이비》에 적힌 메시지 
 
 
 

지난 가을, 헌책 기획 전시 <절판 시집의 추억> 전을 준비할 때, 서울책보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숨은 절판 시집들을 찾았었는데요. 곳곳에 숨은 절판 시집을 발견할 때마다 보물을 찾아낸 듯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찾은 낡고 먼지 쌓인 작은 책들을 촤르륵 넘기면 책갈피와 메모 그리고 껌 종이 같은 또 다른 보물들이 발견될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어떤 사물보다 시집에 적힌 편지를 발견할 때 전율이 일곤 했답니다. 사물도 반갑지만, 마음을 담은 편지에는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그 시대만의 감수성이 오롯이 묻어 있거든요. Emotion 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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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오늘 가져온 이 시집 속의 메시지는, 그 어떤 시집에 적혀 있던 메시지보다 길었고, 시 같은 표현력이 마음을 아련하게 만들더라고요. 서론이 길었네요. 그럼 먼저 메시지를 공개해보겠습니다.Emotion 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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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귀가 빠져뿌린 날
히히, 겨울인디,
눈이 안 와뿌리네
그려, 마음으로 눈 받으면 되제.
살다봉께 요로꼼시 넋두리도 하네
하나로 있고자 했던 날들도
구름 같은 날로 지워져 버렸지
변하지 말자고 한들
몸이 먼저 변하지.
허나, 그 몸 변하고
뒤에 남은 말들이 우스워질 때가 있어도
히히, 겨울인디,
마음으로 눈 받네.
서로 없음으로 생각하는 
깊은 뜻 있으면 
지워진 날 다시 오고
변한 몸 아름다이 볼 수 있으리.

1988, 2월 28일, 늬 생일 앞두고 책하나 주며, 기


Emotion Icon
 
후우...... 긴 숨을 내쉬고 한참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메시지입니다. 서울책보고에서 4년째 책을 다루고 있고, 수없이 많은 옛 메시지들을 마주했지만, 이 메시지 만큼 강렬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이 메시지 자체가 하나의 시 같아서일까요?

아마도 시 같이 모호하고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한 메시지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시집 선물을 주고받은 이들은 서로 어떤 사이였을까요? 여러 관계를 상상하게 됩니다. 이들은 연인이었을까요, 아니면 깊은 친구 사이였을까요. 

세월이 흘러도 우리 사이 변치 말자고 다짐해도, 그 마음보다 몸이 먼저 변하는 이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기’는 ‘서로 없음으로 생각하는 깊은 뜻’이 있으면 그 변함도 아름답게 볼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거 좀 감동 아닌가요? 누가 제 생일에 이런 메시지를 적어줬다면 저는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1988년의 이 두 분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서로의 변한 모습을 아름답게 보고 있을까요? 

이 메시지가 적힌 시집이 1977년에 초판이 나온 문학과 지성 시인선 11권 《메이비》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시집의 표제작 ‘메이비’를 읽어보면, 역시 시의 화자와 ‘메이비’는 어떤 관계였을지 궁금해지기 때문입니다. 시 한 번 같이 읽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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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비

<천막교실, 가마니 위에 비는
내리고>

우리는 고무신으로 찝차를 
만들었다. 미군 찝차가
달려왔다 네가
내리고.

미군들이 쑤왈거리다가 메이비,
하고 떠나고. 그리하여 너는
메이비가 되었다.
미제 껌을 씹는 메이비. 종아리 맞는
메이비.

흑판에 밀감을 냅다 던지는
메이비. 으깨진 조각을 주으려고
 
아이들은 밀려 닥치고.
그 뒤에, 허리에 손을 얹고 섰는
미군 같은 메이비.

남자보다 뚝심 센 여자애보다 
뚝심 센 메이비. 여자애를 발길로
걷어 차는 메이비.

지금은 비가 내리고,
어느 틈엔지 미군들을 따라
떠나 버린 메이비.

바다 건너 가 소식도 모를
제 이름도 모르던 메이비. 어차피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
메이비. 다시는 너를
메이비라고 부르지 않을 메이비.

*
한국 현대사의 어느 한 시절, 아마도 미군 부대 근처에서 일어났을 법한 서사가 떠오르는 시입니다. 화자는 메이비를 먼 곳에서 바라보기만 했지만, 언제나 눈길은 메이비를 쫓았던 걸 보면, 메이비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민에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사랑으로까지 깊어졌을가요? 그 깊은 마음은 모르겠지만, ‘어차피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인 진실을 깨달을 정도로 나이가 들어서도 메이비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서로 없음으로 생각하는 깊은 뜻’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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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기’는 이 시집을 선물로 골랐을까요? 바다 건너 가 소식도 모를 메이비를 기억하는 화자처럼, 언젠가 서로 몸과 마음이 변한 그 때, ‘서로 없음으로 생각하는 깊은 뜻’으로 지워진 날 다시 보고 변한 몸 아름다이 보겠다는 다짐의 표현으로요. 34년이 지난 2022년, ‘기’의 저 다짐이 아름답게 실현되었기를, 눈 오지 않는 11월에 마음으로 눈 받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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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네일 : 1988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왼쪽)와 대회 엠블럼 ©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8091104510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