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ol. 19

SPECIAL

[오은의 오늘의 시] 헌책_그어진 밑줄

리스트_오은.jpg

 
 
 
 
헌책
―그어진 밑줄
 
                         오은

 
 
헌책은 이미 한 번 읽은 책이라는 뜻이다

책을 펼치니
첫 문장 아래 줄이 그어져 있었다 

신부님이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남다를 것 없는 문장인데 
좋아하는 단어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찌르거나 후비거나 휘젓거나 두들기는 표현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신부님을 떠올리다
어려움을 헤아리다
마침내 이번으로 돌아온다
 
지금 아니면 안 되는,
다음번은 기약할 수 없는 이번

그때
스치는 것만으로도 불이 붙었을 것이다
성냥개비가 붉은인(燐)을 만날 때처럼
가슴 어디께 
속수무책으로 불이 댕겼을 것이다 

그때와 이때 사이
대체 얼마큼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신부님은 무사할까
이번은 안녕히 넘어갔을까

불붙은 흔적은 있는데 
제아무리 재를 뒤적여도 
불씨는 발견할 수 없다 

발화점이 달라진 것일까 

문장에 그어진 밑줄 앞에서 
열(熱)을 찾아 열중한다 
열중에는 열이 있는데 
문장은 싸늘하기만 하다

이미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이번을 위해서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제임스 조이스, 〈자매〉(《더블린 사람들》, 이종일 옮김, 민음사, 2012) 中에서
 
 
 
 
 오은 섬네일.jpg

 

오은

시인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