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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9

INSIDE

[세렌디피티] 1980년, 프랑스 철학자의 부고를 챙겼던 그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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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에 촬영한 한국일보 중화동 사옥 © 오마이뉴스
 
Serendipity 
예기치 않은 메모나 물건을 발견하다
 
1980년, 프랑스 철학자의 부고를 챙겼던 그 누군가

《로마인 이야기》가 품은 1980년의 사르트르와 롤랑 바르트 

 

 

 

1980년대 독자분들은 신문 스크랩이 취미셨을까요?Emotion Icon 이번 세렌디피티에서도 지난 호에 이어 여러분께 자그마한 신문 조각 두 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난 호 신문 조각이 1982년 신문기사였다면, 이번 호는 무려(!) 2년이나 더 오래된 신문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안에서 발견한 이 신문 조각은 특별히 ‘사르트르’를 좋아하는 직원이 운명의 데스티니로 발견했답니다. 우연히 서가에서 책 이야기를 하며 사르트르를 좋아해 그의 책을 읽은 이야기를 나눠주던 직원 J. 그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고 하며 손수 책을 찾아 제게 보여주었죠. 그 신문 조각에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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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안에는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와 롤랑 바르트의 부고 기사가 각각 끼워져 있었어요. 먼저, 두 신문 조각 중 시기적으로 앞선 칼럼을 먼저 읽어볼게요! 

 

손으로 ‘한국일보 80.3.30’ 이라고 적어두고 간직했던, 이 기사는 ‘메아리’라는 칼럼입니다. 글의 제목은 ‘롤랑 바르트’이고요. (참고로, 한국일보의 ‘메아리’란은 1959년 10월 24일에 신설된 칼럼으로, 지금까지도 매주 이어지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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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한국일보 : 오피니언 > 메아리 (hankookilbo.com))


 

그럼, 1980년 3월 30일자 ‘메아리’ 앞부분 한 번 읽어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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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프랑스의 사상가요 신비평의 창시자인 

롤랑 바르트가 교통사고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아직 64세였다. 

이미 독창적 저술들로 성가가 높은 그에게 

이제부터 원숙기의 저작 활동이 기대된 터라 

그의 손실이 이만저만 아깝지 않다. 

본지 독자에게는 지난날 파리특파원이 歐洲通信(구주통신)으로 

그와의 대화를 소개한 바도 있어 친근감을 느끼게도 되었을 것이다. 

두 번에 나눠 실은 이 대화는 이제 와 보면 

그의 처녀작을 에워싼 얘기부터 동양과 서양 또 한국에 대한 향수까지 

매우 포괄적인 논의를 담고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그에 대한 소개나 비평이 한국어로는 흔치 않으니, 

이 대화가 흥미 있는 기사임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의 사유 및 저작의 하나의 요약이라는 점에서는 어떤 언어로든 귀중한 기술인 것 같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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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신문 조각에 칼럼니스트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이 칼럼을 쓴 필자는 롤랑 바르트의 지적 작업을 높게 평가하며 신비평의 비조(鼻祖:어떤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처음으로 연 사람)로 여기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로마인 이야기》의 주인이었던 분은 프랑스 철학과 문학에 관심을 가진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짧은 칼럼이지만, 롤랑 바르트에 대한 이야기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현대 지성계에 그가 위치하고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잘 드러내어 주는 짧은 글. 1980년 3월의 어느 날, 롤랑 바르트의 타계 소식을 듣고 반듯하게 이 칼럼을 오려 보관한 이 덕분에 42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롤랑 바르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음은 1980년 4월 17일 한국일보 기사입니다. 이 또한 부고 기사로 ‘사르트르의 철학과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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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새벽 (한국시간) 파리의 병원에서 폐기종으로 타계한 J.P. 사르트르는 

20세기 지성을 대표하는 최고의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실존주의 철학을 전개, 2차대전을 전후로 세계 사상의 큰 줄기를 이뤄 놓았던 

사르트르는 거의 각 문학 장르에서 다채로운 문필작업을 벌인 작가이기도 했으며, 

생애의 대부분을 좌파의 입장에서 프랑스의 드골주의적 정책과 

미국의 정책을 공격함으로써 ‘행동파 지식인’의 한 모델로도 평가됐다. 

사르트르의 이같은 실존철학, 사회적 행동주의, 각 장르에 걸친 문필 활동 등 

다면적인 면모 때문에 그를 어떤 한 문장으로 표현해서 그리기는 불가능하다. 

그의 일생의 주된 신념은 실존주의 철학에 바탕을 두어 왔다. 

2차 대전 직후 허무주의에 휩쓸리고 있었던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은 

‘인간은 오직 그의 행동에 따라 그 자신의 한계 내에서 자기에게 책임을 진다’는

다분히 반기독교적이며 마르크스 유물론적인 주장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철학의 목적을 

‘인간을 불평등과 억압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는 데’ 두었다. 

그는 이같은 실존 사상으로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실존주의의 교황’으로 숭배됐으나, 

일부 대중들과 기독교인들로부터는 

‘신에 대한 거부주의자’로 맹렬히 비난되기도 했다. 

그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평판은 이같이 건너 뛸 수 없는 심연을 사이에 둔 

극단적인 찬양과 극단적인 비판으로 갈라졌다.

사르트르는 《출구 없는 방》, 《구토》 (38년), 《성》 (39년) 등의 소설을 통해 

그가 전개한 실존 사상과 자유의 의미를 추적해 보였다. 

특히 《존재와 무》는 그의 실존 사상을 집대성해서 정리한 책으로 그의 전 사상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극히 형이상학적인 논리로 딱딱하게 이론을 펴나갔기 때문에 

소수의 지적인 고급독자들을 제외한 일반인에게서는 이해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와 50년동안 결혼하지 않은 채 

‘반려자’로서 살아 온 시몬느 보봐르 여사는 

“그는 대중을 위해 싸웠지만, 결국 대중은 그를 거부했다”고 함축성 있게 평했다.

사르트르는 지난 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됐으나, 

이 상이 ‘부르좌’적 상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고 79년에는 오랫동안 지지하고 협조해온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으로부터도 

스스로 등을 돌려버렸다.

그는 이전의 공산주의 운동 지지와는 모순되게 

“베트남의 ‘보트 피플’(난민)들을 서방국가들이 따뜻하게 받아주어야 한다”

고 주장하기도 했다.

10여 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돼 사실상의 집필과 사회활동을 그쳤으며 

최근 수삼년 전부터는 실명을 해서 독서조차 하지 못한 채 지내왔다.

그는 최근 한 기자와의 회견에서 

“나는 나의 건강 악화와 노쇠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는 내가 가진 가능성과 능력을 최대한 실현하고 성취하는데 일생을 바쳐왔다고 믿는다”

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일생을 긍정적으로 돌아보기도 했다. 

 

Emotion 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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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수준 높은 부고 기사였습니다. 앞의 롤랑 바르트 부고 소식은 칼럼 형식이었는데, 사르트르의 이 부고 소식은 사실과 인용을 보기 좋게 엮어 한 편의 완성도 높은 기사를 만들어낸 거죠. 이 기사를 읽으며, 누군가의 부고가 하나의 훌륭한 비평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책 《서평의 언어》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 편집장 메리케이 윌머스가 쓴 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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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Icon

 

전통적으로 《타임스》 부고는 중요한 사실만 다루지도 않았으며 즉결심판을 내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이 《타임스》 부고가 흥미롭고 매력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익명으로 작성된 탓에 불가해한 신의 목소리처럼 들렸을지언정 

때로는 그 즉결심판이 틀린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타임스》 부고가 가진 독특한 영국적 매력의 일부였다. 

《타임스》 부고는 사실을 넘어서는 것들, 즉 고인이 살았던 삶, 

고인이 한 일의 의미는 물론 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짤막한 인물 에세이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_메리케이 윌머스, '나는 영국 시민이었소',  《서평의 언어》50쪽.

 

 

1980년의 한국일보의 부고 기사를 보며, 한 편의 '짤막한 인물 에세이'를 읽은 것만 같습니다. 

 

한국일보를 구독했던 것으로 보이는 이 신문 스크랩의 주인공은 프랑스 사상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그는 프랑스 문학 교수였을까요? 아니면 프랑스 문학 전공자? 그도 아니면 철학을 전공하던 학생일 수도 있었겠죠. 1980년에 프랑스 철학에 관심이 많앗던 그는 1998년 1판 26쇄 《로마인 이야기》 안에 이 신문 조각을 보관하게 됩니다. 

 

1980년의 이 신문 기사는 무려 18년의 시간이 지나 어떻게 《로마인 이야기》 안에 들어가게 된 걸까요? 다른 책에 끼워져 있다가 이 책으로 이사를 간 걸까요? 아니면, 그동안 보관될 책 집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이 책에 들어가게 된 걸까요? 문득 쓸데 없지만 왠지 모르게 궁금한 이 신문 두 조각의 이동 경로가 궁금해집니다. 그나저나 이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이 헌책의 주인분은 지금도 사르트르와 바르트를 읽으며 지내고 계실까요?

 

 

 

 

 

섬네일 : 롤랑 바르트를 그린 일러스트 © 위키백과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oland_Barthes.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