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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8

SPECIAL

[오은의 오늘의 시] 헌책 - 사라진 페이지

리스트_오은.jpg

 

 


 


헌책


-사라진 페이지



                            오은


 


이 책은 500페이지가 넘는다 

 

250번 넘게 페이지를 넘길 때,

 

주인공은 

여행을 떠나고

박물관 앞에서 사진을 찍고 

골목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허름한 식당 옆에 있는 허름허름한 바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

 

사랑은 만나는 것일까?

 

그가 앉은 자리 옆에 

(빈자리가 많았는데도 굳이) 

운명적인 사랑이 앉았을 때 

사랑은 찾아오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우연이 필연이 되는 동안,

주인공과 나이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먹는 취향이나 말하는 방식도 다른 나는 

 

이들의 사랑을 응원한다 

감정 이입이라기보다

감정 이출에 가까운 

 

사랑을 혼자서 한다 

 

등장인물이었다가 주인공으로 격상된

운명적인 사랑은 

주인공보다 더 많이 말한다 

더 큰 꿈을 꾸고 더 깊은 고민이 있다 


더 높은 사랑을 바란다


호숫가에서 피어난 사랑은

바다 위에서 격랑을 만나고

박물관에서 사진을 찍던 주인공은 

어느새 뱃전을 붙들고 오열하기 시작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은 슬슬 끝이 보이는데

이쯤 되면

이야기의 끝이 보여야 하는데 

페이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랑의 끝을 봐야 하는데 

사라진 페이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사랑은 늘 미완인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은 허름해지지 않는 것일까 

 

비행기를 타고 낯선 도시에 내려

박물관, 식당, 바를 거쳐 

호숫가와 바다 위에 머물다 

페이지 위에서 좌초되고 만 날, 

 

더 넘길 페이지가 없어 딱해진 손가락

 

 

 

오은 섬네일.jpg

 

오은

시인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