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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7

INSIDE

[세렌디피티] 시인의 친필 서명에서 상상해보는 다정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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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dipity 
예기치 않은 메모나 물건을 발견하다
 
시인의 친필 서명에서 상상해 보는 다정한 추억

《귀 하나만 열어 놓고》, 이영춘, 문학세계사, 1987 

 

 

여름의 한 가운데, 세렌디피티에서는 한 권의 특별한 시집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서울책보고에 오래된 시집이 많은 것, 잘 알고 계시죠?


80년대와 90년대 시집에는 메모가 남겨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시집을 선물 받는 친구에게 남기는 축하와 사랑의 메시지라든가, 본인이 시집을 구매한 서점과 날짜, 날씨 혹은 특별한 상황 같은 것을 기입하는 경우죠. 그런데 또 한 가지 특별한 메모가 있답니다. 바로 그 시집을 쓴 시인의 서명이 들어있는 경우!


서울책보고 서가에 저자 서명이 들어간 책들이 생각보다 많은데요. 오늘 가져온 시집도 저자 서명이 들어간 특별한 시집이랍니다. ‘저자가 직접 서명해 선물한 책을 어떻게 헌책으로 내놓을 수 있지?’라는 의문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을 것 같아요. 이 시집을 선물 받았던 이들에게는 이 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각자만의 사정들이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 본격적으로 시집을 살펴볼까요? 《귀 하나만 열어 놓고》(문학세계사, 1987)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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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이영춘 시인의 시집인데요. 이영춘 시인은 최근 2021년까지 열여섯 번째 시집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실천문학사)를 낼 정도로 성실하게 작품활동을 이어오는 원로 시인이십니다. 이 성실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귀 하나만 열어 놓고》의 해설을 쓴 최동호 평론가는 시인에 대해 이렇게 평하네요.


 

“유명해지기 위해서 시를 쓰는 시인은 많다. 

재주가 있어서 시를 쓰는 시인도 많다. 

그러나, 이영춘처럼 순진무구한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시를 쓰는 시인은 많지 않다. 

이것이 이영춘의 시를 음미하고 되새기게 하는 까닭이다. 

영혼의 백지 위에 별처럼 빛나는 이름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떨리는 일인가. 

아마도 이영춘은 그러한 시를 쓰기 위해 지금도 스스로의 이름을 썼다가 지우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리라.”

 


이처럼 순진무구한 마음을 지키는 시인이라 평가받은 이영춘 시인은 이 시집이 나올 당시인 1987년, ‘춘천여자고등학교’에 근무하고 계셨답니다. 국문학을 전공하셨으니 국어 교사로 근무하셨겠죠? 그때 제자에게 본인 시집이 나온 기념으로 선물을 주셨었나 봐요. 바로 제자 유◯◯ 님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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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유◯◯ 님은 국어 시간을 좋아하고, 시를 습작하던 제자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당시 담임하고 계셨던 반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모두에게 나눠주셨던 걸까요? 여러 가지 다정한 장면들을 상상하게 되는 서명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에 실린 #너의_이름 이란 시가 더 따스하게 읽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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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 


너의 이름 석자를 쓴다.

하얀 백지 위에 -,

별처럼 선명히

빛을 내는 이름.

그 위에

내 이름 석 자도 써 본다.

어딘가 부끄럽다.

얼른 지운다.

고운 그 이름 하나로

이 세상 빛인 양

내 방 하나 가득

햇살로 퍼지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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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던 이영춘 시인은 춘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문학인들의 ‘로마’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 한 번 들어볼까요?

 

 

“춘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문학인들은 이영춘 시인을 ‘로마’라 부른다. 

시를 공부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영춘을 통해야 만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춘천에서 가장 중심에 서있는 시인이 바로 이영춘이란 뜻이다. 

춘천에 거주하는 여성 시인 거의가 이영춘 시인을 통하여 시인이 되었다. 

이영춘 시인에게 시를 배우면 시적 감흥이 저절로 일어났다. 

이영춘 시인은 그 사람에게 맞는 기본을 엄격히 가르쳤다. 

엄했으나 자애로웠고, 친절했으나 치열했다. 

이영춘 시인은 시를 배우는 이들로선 따르고 본받아야 할 롤모델이었다.


이영춘 시인은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35세의 나이였다. 

당시로선 늦은 나이였지만 이년 후 첫 시집 ‘종점에서’를 출간하여 이영춘이란 이름을 문단에 알렸다. 

그리고 한 해 걸러, 두 번 째 시집 ‘시시포스의 돌’을 상재했다.


그러고 칠 년 만의 오랜 산고 끝에 세 번째 시집 ‘귀 하나만 열어놓고’를 세상에 내놓았다. 

1987년 KAL기의 큰 폭음이 미얀마 암다만 해역에서 들려오던 해였다. 

승객 115명이 꽃처럼 산화했다. 

보름 후에 군부 쿠데타의 주역 노태우 씨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 비극의 잔인한 폭음을 이영춘 시인은 ‘귀 하나만 열어놓고’ 듣고 있었다. 

그해 그는 그 시집으로 윤동주 문학상 우수상과 강원도 문화상을 받았다. 

1987년은 이영춘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_ 최돈선,  2020.12.03., 강원도민일보 (http://www.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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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19. 푸른 숨의 시인 이영춘 < 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 기획 < 특집 < 기사본문 - 강원도민일보 (kado.net)

 

 

바로 윤동주 문학상 우수상과 강원도 문화상을 받은 시집이 오늘 소개한 《귀 하나만 열어 놓고》입니다. 무엇보다 춘천에 연고를 두고 제자들을 길러내며 춘천 여성 시인들의 ‘로마’가 되어 후배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원로시인의 모습을 그려지는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보니, 시인이 제자 유◯◯ 에게 친필 서명을 하며 얼마나 애틋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이름을 새기셨을지 그려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시집을 선물 받은 제자 유◯◯ 님도 어디선가 시를 쓰며 지금도 시를 사랑하는 한 명의 문학인으로 살고 계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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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시인의 《귀 하나만 열어 놓고》는 행운서점 서가에서 만나보실 수 있어요.Emotion 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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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네일 : 춘천여자고등학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