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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8

BOOK&LIFE

[SIDE A] 무용함마저 아름다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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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함마저 아름다운 시절

 

이연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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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생쯤이었던가. 어른들은 자주 미래에 대해 적어내야 하는 빈칸을 내줬다. 돌이켜보면 우스운 일이다. 본인도 한 치 앞 미래를 알 수 없으면서 아이들에게만 자꾸 뭘 적어내라 하니 말이다. 물론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괜히 이 칸에 적어낸 꿈이 내 미래가 될 것 같아서 마치 소원을 빌듯 신중한 마음으로 꿈을 썼다. 초등학생 때는 피아노 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었기에 피아니스트라고 적었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게임을 했기 때문에 게임 원화가가 되고 싶어서 일러스트레이터라 적어냈다. 지금 나는 서른이 넘었고, 그 당시에는 적을 수 없었던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유튜버가 된 것이다. 


지금도 항상 어쩌다 유튜브를 시작하게 됐냐는 질문을 듣는다. 하도 잦은 물음이다 보니 변주를 주기 위해 매번 다르게 대답하지만, 실은 유튜브를 하게 된 사소하고도 구체적인 계기가 하나 있다. 그걸 공식적으로 말해본 적이 아직 없어서 이제야 한번 이야기해 보려 한다. 대학생 때, 4학년이던 내게 교수님이 졸업하고 무엇을 하고 싶냐 물었다. 나는 플리마켓에 참여해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때 교수님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고 이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런 쓸데없는 걸 왜 하니?' 그 순간 내 머리에 이런 다짐 하나가 스쳤다. 타인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면서 괜히 하지 말라고 말하는 그런 이가 되지 말아야지. 특히 그들이 쓸데없다고 말하는 일들이라면 더욱 주저 없이 잔뜩 해봐야겠다. 그게 내가 그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그 다짐에 대답하듯 정말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하고 살았다. 그중 하나가 '인스타그램 라이브'다. 때는 2016년 11월, 인스타그램에서 라이브 기능이 처음 도입되었다. 그때 좋아하는 작가가 라이브를 하는 걸 보고 나도 시작하게 됐다. 처음엔 4명 정도의 친구만 들어와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 별다른 주제 없이 떠들기만 하는데도 재밌다고 해줬다. 용기를 얻어 제대로 해보자는 다짐과 함께 핸드폰 거치대를 샀다. 그마저도 전문적인 게 아니고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볼 때 쓰는 자바라 거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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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

 

 

핸드폰을 달랑달랑 매달아 책상 위 노트를 세로 화면으로 담았다. 대체로 그림을 그리면서 떠드는 방송이 컨셉이었다. 처음엔 재미로만 몇 번 했던 방송이 점점 진지해져 하루의 루틴이 됐다. 매일 뭘 그릴지 생각하고, 수채화나 잉크 펜 등 재료를 다양하게 쓰고, 가끔 게스트를 초대하거나 합동 방송을 하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엔 두 채널이 동시에 라이브를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당시 팔로워가 300명이 좀 안 되던 시절이었는데 많을 때는 20명씩 들어와서 방송을 봐줬다. 그들을 붙잡고 싶어서 오디오가 비는 지점이 없도록 끝없이 말하는 기술을 익혔다. 할 얘기가 없을 때는 얼마 있지도 않은 사랑 얘기를 꺼냈다. 마치 교생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는 것처럼, 라이브에서도 사랑에 대한 주제는 늘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라이브의 단점이 있다면, 꼭 라이브를 하는 때에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몇 안 되는 분들이지만 내게도 작은 고정 팬들이 생겼다. 그들이 내게 평소에도 라디오처럼 듣고 싶다고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서 라이브 영상을 백업해달라는 제안을 했다. 고민에 빠졌다. 인스타그램은 어차피 몇 명 안 보니까 하는 건데 이걸 유튜브에 올리면 진짜 아무도 안 보지 않을까, 지금처럼 그냥 작고 소소하게 하면 안 될까... 그래서 당장은 유튜브는 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몰래 유튜브를 해야겠다고 이상한 다짐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다 진짜 어느날 유튜브를 하게 됐다. 유튜브 보는 재미에 빠졌기 때문이다. 2018년, 회사를 관두면서 집에서 혼자 요리를 할 일이 많아졌다. 그때 유튜브가 요리에 대해서는 블로그보다 더 맛있고 쉽게 알려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요리 유튜브를 자주 봤고, 혼자 먹기 적적할 때엔 먹방 유튜브도 함께 봤다. 그렇게 보다 보니 유튜브 콘텐츠가 TV 프로그램보다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야도 다양하고, 길이도 짧아서 내게 딱 맞았다. 근데 이상하게 그림 쪽에는 재밌는 콘텐츠가 없었다. 나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만 내가 보기에도 지루한, 동네 미술학원 선생님이 석고 소묘를 한 시간씩 하는 영상을 편집도 없이 올려놓는 그런 영상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요리 쪽엔 이렇게 재밌는 영상이 많은데 왜 그림은 재밌는 영상이 없는 건지 궁금해서, 동시에 유튜브를 보는 게 재밌으니까 하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서 채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영상은 많은 이들이 안 봐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관객이 20명만 되어도 나는 충분했으니, 조회수가 100만 나와도 성공한 것이리라. 그래서 아무도 안 본다는 생각에 되레 아낌없이 정보를 담을 수 있었다. 그런 진심이 통해서인지 6개월 만에 10만 구독자를 넘겨 실버 버튼을 받을 수 있었고, 5년이 지난 현재는 93만 유튜버로서 현재 골드버튼을 기다리고 있다.


청춘의 정의는 다양하겠지만, 나는 꿈을 꾸고 시작을 한다면 나이 상관 없이 언제나 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것들을 하다 보면 이 지나 여름, 그리고 가을이나 겨울 같은 감상을 느끼게 된다. 처음 내게 유튜브가 봄 같았지만 현재는 여름이나 가을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계속 나에게 봄이 되어줄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 지금은 그게 운전면허 도전하기다. 좀 이따 처음으로 기능시험 연습을 하러 가는데, 운전의 세계에서 나는 면허도 없는 초심자이기 때문에 아주 젊거나 어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처음이나 미숙함이 창피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살아있게 하는 청춘의 마음가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20대 때 한 것 치고는 대범하고 발칙한 생각이지만, 교수님이나 다른 어른들이 들으면 뭐라고 할 만한 일을 하기로 다짐한 건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하려고요'라고 했었어도 고개를 저었겠지. 그게 어떤 이를 90만 유튜버로 만들어준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청춘을 어느 한 시기로 한정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일을 해도 괜찮다. 그게 지나서는 정말 멋진 일이 되기도 한다. 나는 결국 그때 다짐했던 플리마켓도 해냈다. 제작비에 10만 원을 쓰고, 20만 원을 벌고, 그날 놀러 온 친구들에게 밥을 사느라 10만 원을 써서 결국 번 돈은 0원이 됐지만 그럼에도 내겐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다. 남들이 뭐라고 하는 일을 해도 큰일 나지 않으며, 도리어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누군가 언제가 청춘이었냐 묻는다면 친구가 사다 준 꽃다발을 들고 작은 가판대에 앉아 책갈피나 엽서 따위를 팔고 있던 내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어느 하나라도 실용적인 게 없는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만 떠올리면 청춘이 무용함마저 아름답게 해주는 시절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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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

크리에이터

 

 펼 연(演) 자를 쓴다. 이름처럼 사는 삶을 꿈꾼다. 

디자이너로 일하다 회사를 그만뒀고, 평생 그림을 그렸으니 그림 영상을 올려보자는 생각으로 2018년에 유튜브를 시작했다. 

유튜브 채널에 올린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10가지 방법’이란 제목의 영상이 수십만 구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독보적인 그림 크리에이터로 자리 잡았다. 

쓴 책으로 《모든 멋진 일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매일을 헤엄치는 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