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ol. 36

SPECIAL

[헌책보고 고전보고] 처음, 새로운 기준점을 만드는 시간


키두니스트.jpg

 

 

헌책보고 고전보고 Ep. 26

처음, 새로운 기준점을 만드는 시간

 

키두니스트(Kidoonist)

웹툰 작가,  편식하는 독서가

 

Emotion Icon<헌책보고 고전보고>는 헌책과 고전문학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처음은 언제나 중요하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만큼, 처음은 인생의 어떤 행로를 걸을 때 중요한 시작점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학교생활을 시작할 때, 중요한 시험을 준비할 때, 첫 취직을 할 때 등에 이 말을 사용한다. 물론 시대와 환경이 달라진다면 이 사례 역시 달라질 것이다. 농경사회의 청년이라면 첫 농사를 지을 때, 근대 영국의 꿈 많은 소년이라면 첫 항해를 할 때 처음이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다. 

그렇다. 뉘앙스를 고려하면 좋은 시작이 이후 무난한 행로를 웬만큼 보장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꼭 그렇지는 않다. 성실하게 준비해서 첫 취직을 했는데 회사가 삐걱거리고, 첫 농사를 기껏 지었는데 가뭄이고, 첫 항해를 했는데 선상 반란이 일어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일러스트 1- 2월.png

© 키두니스트 Kidoonist

 

 

필자가 자주 읽는 세계 고전문학은 한층 더 난감하다. 막연한 편견과 달리 문학 속 서사는 모범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어떤 장래 계획에 따라 척척 첫걸음을 밟기보다는 <의도치 않게><결과적으로> 운명적 사건에 휘말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지, 하고 꿴다기보다는 나중에 온갖 풍파를 겪고 나서 되돌아보니 그게 첫 단추(그것도 좀 이상하게 꿰인)였더라는 쪽이다. 설령 의도되게 무언가를 시작했더라도 작중 상황은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그러고 보면 인생도 좀 그렇지 않은가? 기대대로 흘러가는 무난한 삶이 몇이나 될지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혼란스러운 선례가 있다 해도 우리에게 있어 <처음>은 여전히 중요하니 말이다. 순수한 첫걸음, 의도된 첫걸음은 단순히 성공을 바라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후 삶의 행로에서 거대한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첫걸음에 내포된 의지와 그것에 따라오는 자잘한 행동들은 모두 그 뒤에 따라올 사건의 발판이 된다. 그리고 그 발판이 위기의 순간에 한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고전 속에서 그나마 모범적인 예를 가져올 차례다. 아서 코난 도일셜록 홈즈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사실 대중에게 덜 알려진 또 다른 시리즈도 써냈다. 바로 챌린저 교수 시리즈다. 이 시리즈에서 주인공 말론은 챌린저라는 괴짜 교수와 만나 숱한 모험에 참여한다. 첫 작품인 잃어버린 세계는 남미의 한 고지대가 배경이며, 그 위에는 이미 멸종한 줄 알았던 동물이 잔뜩 살고 있다. 말론은 기꺼이 그곳으로 가는 위험한 모험에 참여한다. 그의 모험을 향한 첫걸음이다. 

재밌는 것은 그 전개 과정이다. 말론은 본래 평범한 사회인이었으며 특별히 모험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가 모험에 나선 이유는 좋아하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말론은 용기를 냈고, 그의 용기와 헌신은 챌린저의 모험에서 당당히 활약할 추진력을 만든다. 모험이 꼭 예상대로 되진 않았다. 말론과 동료들은 모험 중에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당초 목적이었던 여자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한 번 모험한 뒤에 결혼해서 가장이 된다는 말론의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일러스트 2- 2월.png

© 키두니스트 Kidoonist


하지만 설령 일부가 어그러졌더라도 말론의 이야기는 퇴색되지 않는다. 말론이 모험의 첫 단추를 꿴 각오가 그에게 새로운 중심을 세워주고 의지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말론의 인생에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없었을, 모험으로 가득 찬 스펙타클한 일생이 말이다. 

이제 음력으로도 새해가 밝았다. 모두가 새로운 각오를 하고 새로운 걸음을 옮기는 시기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예상대로 흐르진 않을 터. 그때 우리에게는 첫걸음을 디딜 때 지녔던 순수한 각오가 필요하다. 인생의 혼란한 흐름에서 단단한 뿌리와 의지만이 우리를 바로 세워줄 것이다. 

 

 

20221210162559_gofewisg.jpg

 

키두니스트(Kidoonist)

웹툰 작가, 편식하는 독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문학,

그 중에서도 장르문학 위주로 읽는 습관이 있다.

고전문학의 재미를 알리고자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수십 권의 책을 만화로 리뷰했다.

수입의 상당 부분을 책 사는 데에 쓰고 있으며 언젠가 개인 서재를 갖고픈 꿈이 있다.

《고전 리뷰툰》, 《고전 리뷰툰 2》를 출간했다.

교양만화 플랫폼 <이만배>에서 고전 리뷰툰 플러스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