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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4

SPECIAL

[오은의 오늘의 시] 헌책_새 옷 입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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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_

새 옷 입은 책 

 

                오은

 

 

 

내일이면 나도 

한 살 더 먹을 텐데 

목욕탕에 갈 텐데

설빔을 입을 텐데 

말끔한 옷차림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텐데

달을 보며 

인생에 새바람이 불게 해주세요! 

허무맹랑한 소원을 빌 텐데


헌책은 벌써 나이를 먹은 것 같다

충분히 먹어서 배부른 것 같다

멀뚱한 표정을 지은 채

코 먹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거참, 나도 좀 씻겨줘

이참에 멍든 자국도 지워줘

접힌 주름도 감쪽같이 펴줘

나도 새 옷을 입고 싶다고!


마른행주를 꺼내

헌책 이곳저곳을 닦아준다

어디가 눈코입인지

어디가 팔다리인지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먼지는 폴폴 날리고

바로 세우려고 할 때마다

서지 못하고 자꾸 눕는다


픽, 하고 쓰러질 때

힘없이 삐져나온 가름끈


가름끈은 책 꼬리 같다

감출 수 없는 비밀처럼

몸 밖으로 자꾸 비어져 나온다

빗으로 빗어주고 싶지만

이미 산발이다

설움을 풀어헤치는 것처럼

나이에 스러지고 만 스스로가 미운 것처럼

낯빛이 창백하다


헌책에 커버를 씌운다

새 옷 입히는 마음으로

한 살 더 먹었어도

겨울이 아직 남았으니까


헌책이 다시 설 수 있게 해주세요!

허무맹랑한 소원을 하나 더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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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시인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