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ol. 34

BOOK&LIFE

[SIDE B] 건강한 감정조절방식으로서의 키덜트 문화

20230825141402_rlolhdwv.jpg

 

과 

건강한 감정조절방식으로서의 키덜트 문화 

 

이지영

교수

서울디지털대학교 상담심리학부

 

 

Emotion Icon북&라이프 side B <책과 심리학>은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교수이자 한국심리학회 공인 임상심리전문가인 필자의 글을 통해,

치유, 개선, 회복의 방법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20대 초반에 나는 어른이 되는 것이 싫었다.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 어른이 되면 해야만 하는 수많은 것들이 부담스러웠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결혼을 해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등 직장과 가정 안에서 주어지는 역할에 따른 의무와 책임이 부담스러웠다. 직장인으로서, 부모로서 각 역할을 해내는 데 따르는 근심과 걱정거리가 많고, 긴장되고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부모가 되어보니 수많은 근심과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멈추고 싶어도 멈추기 쉽지 않고, 끝낼 수도 없다는 걸 안다. 수많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다양한 고민과 걱정을 가슴에 안고 힘겹게 버티고 살아가는 거다. 삶은 우리 모두에게 고단하고 힘겹다. 


최근 들어 생활용품 매장에 매 시즌마다 새롭게 전시되는 캐릭터 상품들이 내 눈길을 끈다. 그리고 우리 집엔 우편물 수납 벽걸이, 슬리퍼, 주방 수건 등 다양한 캐릭터 물건들이 늘어나고 있다. 쓸모는 그다지 없으나,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우편물 수납 벽걸이는 캐릭터를 가리기 때문에 우편물을 넣지 않는다. 주방 수건은 더럽고 헤질까 봐 손을 닦지 않는다. 아이가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사게 된다. 이처럼 성인이지만 아이들이 즐길 법한 다양한 문화를 소비하고 즐기는 현상을 키덜트 문화라고 한다.



2023121120180465121_1702293484_0924334400.jpg

▶ 서울과 부산 대형 쇼핑 매장에 설치된 캐릭터 포토존과 팝업 스토어.

캐릭터 인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 국민일보

 


심리학적으로 볼 때, 키덜트 문화는 방어기제 중 퇴행을 사용하여 현재의 불안과 고통을 건강하게 감소시키는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즉 어린 시절의 발달단계로 되돌아감으로써 일시적으로 현재의 고통과 불안 등의 힘겨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직장 등의 사회생활 중에는 어른스럽게 행동하다가, 친한 친구, 연인이나 가족을 만났을 때 애교를 부리고 유치한 장난을 치며 웃는 것도 건강한 퇴행이다. 어린 시절에 즐겼던 놀이를 하고, 그때 함께 했던 캐릭터 상품들을 소유하면서 어린 시절의 순수하고 맑았던 감성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뛰놀던 시간, 어리고 미숙하다는 이유로 실수나 잘못을 해도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무거운 책임을 지우지 않았던 시간으로 잠시나마 돌아가 머물러 본다. 내가 쓴 책 《어린이 심리스쿨》의 다양한 동화 가운데 피터 팬 이야기는 이러한 고민을 풀어내고 있다. 


어린이 심리스쿨.jpg

▶ 《어린이 심리스쿨1 : 세계명작 편》, 이지영, 배정진 지음, 안지혜 그림, 아울북, 2017 

 

 

전에는 “어른이 어른스러워야 한다.” 등의 고정관념이 지배하면서, 어른이 어린이의 문화를 즐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키덜트 문화가 건강한 퇴행의 방식으로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면서, 많은 사람이 키덜트 문화를 하나의 취미생활과 스트레스에 대한 감정조절방식으로서 당당히 즐기고 있다.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에 누리지 못한 욕구를 지금에 와서 충족시키고자 하는 결핍의 보상으로서 키덜트 문화를 이해할 수도 있다. 25년 전 대학원을 다닐 때 같은 연구실을 쓰던 굉장히 어른스럽고 정말 선배 같은 선배가 있었다. 언제나 고민이 많았던 나는 그 선배에게 많은 조언을 구하곤 하였다. 그런데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선배의 유일한 취미는 곰돌이 푸우, 도널드 덕 등 어린 시절 즐기던 캐릭터 스티커나 학용품 등을 구입하는 것이어서 좀 놀란 적이 있다. 지금도 주변에 굉장히 어른스럽고 지혜롭고 강인한 친한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의 취미는 딸이 좋아할 법한 귀여운 인형과 팬던트, 캐릭터 등을 모으는 것이어서 다소 의아했었다.


인간의 발달단계마다 성취해야 할 과제가 있고, 그 시기에 즐기고 누려야 할 것들이 있다. 어린이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노는 거다. 놀이를 통해 창의적인 사고와 자율성이 길러진다. 이 시기에 충분히 놀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면, 언제든 마땅히 누리고 충족해야 했던 욕구가 올라와 채우려 애쓴다. 주변의 여러 상황으로 인해 어른스러워야 해서, 조숙했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과거 어린 시절 누리지 못했던 그 어린아이다움을 누리고자 하는 거다. 또는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어린 시절 갖지 못했던 장난감들, 예를 들어 바비 인형, 건담 시리즈 캐릭터, 레고 등을 어른이 되어서 구입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키덜트로는 너무 일찍 데뷔해서 유년 시절이 없었다고 회고했던 마이클 잭슨을 들 수 있다. 그는 엄청난 장난감을 사 모았을 뿐 아니라, 아예 집을 놀이동산처럼 꾸며 놓기까지 하였다.



네버랜드20231215_140915.jpg

▶ 1987년에 마이클 잭슨이 1950만 달러(약 216억원)을 들여 네버랜드(Neverland)를 만들었다.

저택을 비롯해 놀이기구, 동물원, 목장 등이 있으며, 네버랜드라는 이름은 《피터팬》에 나오는 어린이들만 사는 섬에서 따온 것이다. © 조선일보

 

경제적 풍요로움과 쇼핑 및 배달 시스템의 발달로 인해, 요즘 아이들은 갖고 싶은 것을 빠르게 손에 넣는다. 거의 대부분 아이들이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부족함 없이 크는 걸 본다. 그러나 성인이 된 우리들이 자랐던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시기는 아니어서 갖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대학생 시절 고액의 아르바이트로 모은 목돈으로 내가 제일 먼저 구입한 것은 어린 시절 그토록 갖고 싶었던 예쁜 침대와 소파 등의 가구였으니까 말이다. 이제는 경제적 능력이 있어서 스스로 사줄 수 있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때 살 수 없었던 것을 성인이 된 지금은 마음껏 사서 누릴 수 있는 소비의 매력이 있다. 


게다가 온갖 잡생각과 고민들로 꽉 차 버린 머리를 종이접기, 조립장난감, 색칠 놀이 등과 같은 단순한 놀이를 통해 비울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들어가 유쾌함을 느끼고,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면서 뿌듯함도 느낀다. 성인이 된 지금 쉽게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시점에서, 키덜트 문화는 작은 성취감을 주는 효과까지 있다. 출판사 <세계와나>에서 편집한 책 《새로운 종족의 탄생, 키덜트족》에서는 키덜트 문화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든 어른의 마음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다. 그 내면 아이는 늘 우리와 함께 있었고, 알게 모르게 얼굴을 내밀고 모습을 드러내 왔다. 이제 내면 아이를 부인하고 억압하지 말고, 내 안의 어린아이를 마주하고 만나보자. 그 아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고, 그 아이가 원하는 욕구를 이제는 기분 좋게 충족시켜 보면 어떨까. 상황이 가능하다면, 잠시 동안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즐겨보면 어떨까. 어른이 아이같이 논다고 비웃지 말고 말이다. 잠시나마 힘겹고 빡빡한 삶에서 벗어나 해맑고, 유치해서 더욱 즐거운 그 기분을 누려 보면 어떨까 싶다.  

 

 

 

 

이지영 교수 프로필 섬네일_최종.jpg

 

이지영

교수

서울디지털대학교 상담심리학부

 

서울대 심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고,

감정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감정을 이해하고 다루도록 코칭하고 있다. 

《정서 조절 코칭북》, 《생각이 크는 인문학:감정》, 《어린이 심리 스쿨》,

《나를 잃어가면서 지켜야 할 관계는 없다》등의 다수의 감정 관련 저서를 출간했다.

KBS1 라디오 <정용실의 뉴스브런치>의 <뉴스브런치 부설 심리연구소>에 고정 출연하고 있고,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이지영 교수의 감정코칭>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섬네일 : 영화 〈피터 팬〉(1957)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3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