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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0

SPECIAL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 과몰입러의 불행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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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몰입러의 불행한 최후

《애서광들》과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 

 

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Emotion Icon영화학 박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필자가 영화와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는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라울 기유마르가 친구였던 쥘 시지스몽의 죽음 이후 매일 달력을 쳐다본 건 그가 소장하고 있던 희귀본들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당대의 소문난 애서가로, 고서의 초판본이나 인큐내뷸러(1501년 이전에 인쇄된 유럽의 책)를 두고 늘 경쟁했다. 기유마르는 시지스몽의 진귀한 책들이 경매에 나올 날만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소식이 없자 시지스몽의 상속자들에게 그가 남긴 장서를 모두 사들이겠다고 먼저 제안한다. 그러나 대리인을 통해 들려온 소식은 시지스몽이 유언장에 단 한 권의 책도 자신의 서재를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해놓았다는 것이다. 현재 그 책들의 소유자는 시지스몽의 약혼녀였던 58세의 엘레오노르였다. 기유마르는 그녀가 아직 미혼이라는 얘기를 듣자 쾌재를 부르며 당장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대리인은 거의 울먹이며 그를 만류한다. 

 

“제가 그녀를 봤는데, 괴물이 따로 없었어요. 머리칼도 없어 가발을 썼고, 이빨도 다 틀니고, 코는 매부리코에 뺨에 박힌 세 개의 사마귀에는 뻣뻣한 털들이 돋아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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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11편이 담겨 있는 《애서광들》, 옥타브 위잔 글, 알베르 로비다 그림, 북스토리

 

《애서광들》에는 19세기 전후를 배경으로 책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줄줄이 펼쳐진다. 이라는 글자가 설명하듯 이들은 거의 책에 미쳐 있다. 2장 시지스몽의 유산의 등장인물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지금 내 주변에만 해도 매달 수십만 원어치씩 책을 사고, 집 전체를 도서관처럼 꾸며 놓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의 광기에 비하면 그들의 열정은 조족지혈일 뿐이다. 하긴 책 이외에 미디어가 별로 없었던 시대니 덕질의 강도가 더 높았을 만도 하다. 기유마르가 시지스몽이 남긴 희귀서적들의 목록과 그 가치를 열거할 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은 거의 없었지만 그 책들을 향한 기유마르의 애정만큼은 강렬하게 느껴진다. 

 

취미가 직업이 되거나 욕망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전자는 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와 자기개발서 등에서, 후자는 사회면 범죄 뉴스에서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과 함께. 취미 생활에 그다지 몰입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끄는 것만은 똑같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릴 때부터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걸 두려워하는 성향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절제를 못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리라. 고백하건대 나는 노는 데는 지치는 줄 모르는 체력을 가졌으며, 아무리 배가 불러도 좋아하는 음식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식탐을 가진 사람이다. 시간이 없을 때조차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며칠씩 온·오프라인을 샅샅이 뒤지는 집요함에 스스로 질릴 때가 있다. 소심함이 조금만 덜했더라면 벌써 어떤 황당한 취미에 빠져 빚더미에 앉아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다. 그러니 과유불급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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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2015) 포스터 ⓒ 다음영화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데이비드 젤러, 2015)의 쿠미코는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1996)를 파고든다. 사회성이 부족한 그녀에게 직장 생활은 고달프기만 하고, 외로운 시간을 달래는 데는 영화만 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사건은 쿠미코가 <파고>를 실화로 받아들이면서 주인공이 영화 마지막에 묻어 놓은 돈 가방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면서부터 발생한다. 언어가 부족한 쿠미코는 닥치는 대로 도움을 청하며 마침내 노스다코타주의 파고에 도착한다. 눈으로 온통 하얗게 물든 공간에 쿠미코가 빨간 모자가 달린 코트를 두르고 있는 모습은 이 영화의 대표적 이미지로, 그녀의 멍한 눈빛에는 충격, 절망, 상실감 등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다. 쿠미코는 <파고> 도입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함이라는 자막에 꽂히는 바람에 엔딩 크레딧의 이 이야기는 픽션이라는 작은 글귀는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놀라운 사실은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가 2001년에 있었던 코니시 타카코라는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임이 밝혀졌으나, 죽기 전 경찰에게 ‘<파고>의 가방을 찾아다닌다.’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세간의 이목을 끌었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과몰입러의 비극적인 최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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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쿠미코, 더 트레저 헌터〉 속 장면들 ⓒ 다음영화 

 

기유마르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엘레오노르가 박색이라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찾아가 청혼한다. 엘레오노르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너처럼 책을 노리고 접근한 인간이 한 둘인 줄 아냐며 단칼에 거절한다. 뿐만 아니라 평생 자신과의 결혼을 미루고 책만 사들인 시지스몽에 대한 원한 때문에 그 귀한 책들이 다 상하도록 서고에 쥐를 풀고 비를 맞도록 해놓았다는 말까지 해준다. 신경쇠약에 시달릴 만큼 속이 상한 기유마르는 엘레오노르의 옆집을 사들여 책을 구원하기 위한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직접 서고에 고양이를 풀고, 기왓장을 고치고, 급기야 시멘트까지 바르는 등 엘레오노르에 맞서는 그의 노력은 처절할 정도다. 기유마르와의 전쟁에 지친 엘레오노르는 어느 날, 기유마르의 청혼을 승낙한다. 그러나 기쁨으로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서고에 들어선 기유마르가 발견한 것은 레이스처럼 너덜너덜해지고 구멍이 숭숭 뚫린 희귀본들이었다. 엘레오노르가 책벌레들을 풀어놓은 것이다. 그것도 일부러 크고 식욕 왕성한 외국 책벌레를 수입했다나. 기유마르는 당장 엘레오노르의 목을 졸랐으나 충격으로 탈진한 탓에 그녀보다 먼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조금은 고상해 보이는 애서광도 비참한 최후를 맞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나는 그래서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택했는지 모른다. 아무리 빠져들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으려면 그것이 직업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다행히 영화 보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도 없었고, 글을 끄적거리는 것 외에 잘하는 일이 없기도 해서 그런 결심이 어렵지 않았다. 돌아보면 학업과 알바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틈틈이 시네마테크를 전전하던 때만큼 행복했던 시절도 없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조조부터 내리 5편씩 보면서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데뷔작 <환상의 빛>(1995)과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안녕, 나의 집>(1999)을 연달아 보던 날이나 <카메라를 든 사나이>(지가 베르토프, 1929)를 처음 보았던 저녁 느꼈던 감흥은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대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시사회가 시작할 때마다 약간의 긴장감과 설렘이 감도는 영화관의 공기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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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 연방의 영화 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다큐멘터리 영화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구소련 여러 도시 속 시민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왼쪽은 DVD 표지, 오른쪽은 영화의 한 장면이다. ⓒ 다음영화

 

뒤늦게 취미에서 적성과 재능을 찾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이들은 기유마르나 쿠미코 같은 인물들과 달리 취미를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대단한 사람들이다. 축하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박수는 받지 못할지라도, 애초에 취미를 직업 삼아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매사 감사하게 된다. 단, 늘그막에 욕망이 고개를 드는 대상만 생기지만 않는다면, 과몰입러도 행복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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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그런대로 행복한 영화 호사가

지금은 문화 전반에 관해 얘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만들고 있다.

여행 에세이집 《세도시 이야기》(공저), 짧은 소설로 릴리 이야기를 썼다.

 

 

 

 

 

섬네일 : 영화 〈파고〉(1996)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7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