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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8

SPECIAL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 오피스 빅뱅 시대의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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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빅뱅 시대의 프리랜서

 

 

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Emotion Icon영화학 박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필자가 영화와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는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오. 피. 스. 빅. 뱅. 

다섯 글자를 꼭꼭 씹으면서 대략 난감해졌다. 

스물다섯 살에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하고 강의하고 글 쓰는 일이 다였지, 20년 동안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 주제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밤새워 원고라는 도깨비와 씨름하다 동이 트면 암막 커튼으로 창문을 봉쇄한 후 이불 속에 들어가는 날이 대다수였던 내가 출퇴근 지하철의 고단함을 알 리 없다. 오랫동안 내 밥벌이가 되어주었던 대학 강의는 학생들만 상대하면 되는 일이라 직장 상사(?)라 할 수 있는 정교수님들과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으며, 집에 있는 날이 많아서 만보계는 종종 두 자리 숫자에 그치고 만다. 여름마다 휴가 언제 가냐는 질문을 받으면 '프리랜서는 일없으면 맨날 휴가죠.’ 라고 준비된 대답을 해준다. 재택근무니 워라밸이니 직장 문화의 변화를 운운하기에 참으로 부적절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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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턴〉(2015) 포스터 ⓒ 다음영화

 

영화도 고전적인 직장 생활에 관한 것들만 떠오른다. 아직 코로나 팬데믹이 바꾸어 놓은 직장 문화가 영화로 개봉하기는 이른 시기다. 가령, 〈인턴〉(낸시 마이어스 감독, 2015)은 30대 여성 CEO와 70대 남성 인턴의 관계 변화를 그린 작품으로 당시에는 꽤 신선했지만 8년이 흐른 현재의 관점에서는 글쎄, 획기적인 아이디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 영화는 매력적인 두 인물을 앞세운다. 인터넷 쇼핑몰의 급성장으로 탄생한 젊은 CEO, 줄스(앤 해서웨이)는 회사 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활달하며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30분 단위로 시간표를 짜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생활만큼은 20세기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데이빗 프랭클 감독, 2006)에서 유별난 상사의 수족처럼 일하기도 했던 배우 앤 해서웨이는 CEO가 된 이 영화에서도 똑같이 피곤하고 지쳐 보인다. 그의 비서로 들어온 백발의 인턴, 벤(로버트 드니로)도 자기소개 영상에서 평생 한 직장에 다녔던 그의 성실성과 충성심을 강조한다. 연금으로 노년을 여유 있게 보낼 수 있음에도 일하고 싶어서 인턴에 지원한 벤의 모습 때문에 몇 년만 더 지나면 이 영화는 오피스 빅뱅 이전의 직장 문화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남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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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에서 다루는 이슈들은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의 해외 흥행 순위 1위인 나라는 한국이다 . ⓒ 다음영화

 

 

이직, 퇴직, 재택근무, 워케이션… 언젠가부터 매년 서점가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몇 주씩 점령하게 된 연간기획물, 《트렌드 코리아 2023》(김난도 외, 2022)은 2023년의 트렌드 중 하나로 이와 같은 키워드들을 제시하며 이미 시작된 오피스 빅뱅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재택근무의 단맛을 본 직장인들은 사무실로의 출퇴근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런 이들 중 더러는 직장을 그만두기도 한다는 것이다. 근무조건이 좋은 곳을 찾아 옮겨 다닐 수 있는 능력은 동시대 직장인들이 가장 선망하는 것이다. 문득 911테러가 일어나던 날 함께 점심을 먹었던 동아리 선배가 생각난다. 그 선배는 30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외국계 회사인 A사에서 B사로 옮겼다가 다시 A사로 스카우트 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능력과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내가 이직을 할 때 뭐가 가장 중요하냐고 물었더니 선배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돈이지.” 당시로서는 이게 정답이었다. 

만약 지금 직장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다른 대답이 나올 확률이 높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곳, 휴가를 많이 주는 곳, 워케이션이 보장된 곳 등등. 아, 회식이 없는 회사도 선호한다. 코로나로 인한 모임 인원 제한이 풀리자 내 주변 샐러리맨들은 하나같이 회식 날짜부터 잡혔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회식이라는 게 남의 돈으로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노래도 부르는 건데 왜 그렇게 싫으냐고 물으면 또 하나같이 나를 째려봤다. 아무리 〈술 권하는 사회〉가 100년 전 단편소설 제목에 불과한 시대가 되었다지만, 친한 동료들뿐 아니라 데면데면한 사람들과도 어울려야 하는 회식 자리는 바늘방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는 조직으로의 편입 자체를 거부하는 긱 노동자(Gig Worker)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긱 노동자초단기 노동자를 의미하는데, 이런 이들을 중계하는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플랫폼 노동자라고도 불린다. 단기로 고용되는 웹 디자이너, 동영상 편집자, 우버 드라이버 등 1인 자영업자, 프리랜서도 긱 노동자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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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의 소비트렌드를 10개의 키워드로 말한 《트렌드 코리아 2023》, 김난도 외, 미래의창, 2022(서적백화점 / 9,000원)

  

그렇다면 나도 할 얘기가 있다. 오피스 빅뱅이 직장 문화뿐 아니라 노동 형태의 다변화로 이어져 프리랜서가 많아졌다면 말이다. 사실, 팬데믹 이전부터 직장을 다니면서 취미로 유튜브에 콘텐츠를 올리던 이들이 아예 전업 유튜버가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고,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의 수입은 전문직 종사자보다도 훨씬 낫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직장인부터 MZ세대까지,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 분야에 도전한 사람 중 극히 일부만 밥벌이에 성공한다는 얘기는 길게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긱 노동자로서 20년을 살아온 나도 나이 들수록 안정적으로 되기는커녕 아직도 다음 달 수입이 제로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함께 산다. 특히 나처럼 예민한 사람들은 출퇴근 지하철의 고단함과 맞바꿔야 하는 것이 편안한 잠자리다. 회사를 나오기 전에는 꼭 자신의 성향과 성격을 신중하게 통찰해 보시기 바란다. MBTI 같은 거 말고, 쫌!😉 

 

그보다 더 절실하게 알려주고 싶은 말은 오피스 빅뱅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한국에서 프리랜서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열악한 사회적 처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가입자들의 건강보험료는 살인적인데, 은행에서는 국민연금이 없고, 수입이 불안정하며, 소득증명이 잘 안 된다는 이유로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어르신들이 프리랜서라고 하면 백수와 같이 취급하는 것과 유사하다. 프리랜서도 신용 대출이 된다고 해서 가보면 현재 일하는 회사와의 계약서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종합소득세 신고를 할 때 잡혔던 임금을 주는 회사여야 하므로 사실상 최소 1년 이상은 지속해서 함께 일하는 회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건 일부 계약직 프리랜서나 가능한 일이고, 대부분의 긱 노동자들은 금융 활동에 제약이 많다. 대대적인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피스 빅뱅의 한가운데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망설여진다면, 떡을 양손에 쥘 수는 없다는 것만 기억하자. 산업 혁명 이래로 자영업자들은 늘 샐러리맨을 꿈꾸고 샐러리맨들은 언제나 자영업자를 꿈꿔왔다는 것을. 그리고 고통은 노동의 본질이라는 것을. 쉬운 밥벌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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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그런대로 행복한 영화 호사가

지금은 문화 전반에 관해 얘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만들고 있다.

여행 에세이집 《세도시 이야기》(공저), 짧은 소설로 릴리 이야기를 썼다.

 

 

 

 

 

섬네일 : 영화 〈인턴〉(2015)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94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