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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6

BOOK&LIFE

[SIDE A] 인공지능 글쓰기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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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글쓰기 기계

 

한혜원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융합콘텐츠학과

 

 

 

 

▣ '인공지능 포비아'에서 '인공지능 필리아'로의 전환

 

필자는 융합콘텐츠학과 대학원에서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랩(Creative Content Lab)'을 운영하고 있다. 콘텐츠 기획과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연구하는 우리 랩에도 지난해부터 인공지능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인문대, 사범대, 공대, 예술대 등 전공과 상관없이 인공지능에 대한 학생들의 불안한 목소리를 듣게 됐다. 

 

“이제 인공지능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작곡도 합니다. 앞으로 우린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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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고 쇼크 이후, 미디어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말 것이라는 'A.I. 포비아'에 잠식되어 갔다.   

《너 어떻게 살래-인공지능에 그리는 인간의 무늬》, 이어령, 파람북, 2022

 

이어령은 《너 어떻게 살래》에서 인공지능 등장 초기에는 인공지능에 패배할 것이라는 일차적인 포비아(phobia)가 만연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의 반응은 포비아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어령은 이제는 인공지능을 인간 내부의 상상력에서 발현된 내재적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상호협력적인 필리아(philia)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인공지능도 인간 상상력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기술 유행의 파도쯤으로 생각했던 필자 역시 더는 관망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다양한 인공지능 창작 소프트웨어들을 직접 써보기 시작했다. 2023년 2월 기준 인공지능 글쓰기 소프트웨어는 약 70종 이상 등록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대규모 언어 모델을 사용한 한국어 버전의 인공지능 글쓰기 소프트웨어는 많지 않아서, 일단 이번에는 해외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연구대상으로 채택했다. 업무 메일이나 홍보 문구 등 이른바 비즈니스 솔루션을 제공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야말로 허구적인 스토리를 생성할 수 있는 인공지능 글쓰기 소프트웨어 중 GPT-3를 적용한 (Shortlyread LTD 개발)에 주목했다.

 


▣ ‘글쓰기’에서 ‘글짓기’로의 전환


인공지능 글쓰기 소프트웨어는 글을 쓰는 입장에서도, 글쓰기를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첫 만남에서 ‘Shortly A.I.’(클릭)는 자신을 ‘당신의 A.I. 글쓰기 동반자(Your A.I. Writing Partner)’라고 소개했다. 또한 자신의 역할이 주로 ‘당신이 글을 쓰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장애물(Writer’s block)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빈칸에 제목을 입력하는 것으로부터 본격적인 인간과 기계의 상호협력적 글쓰기가 시작된다. 연구팀은 〈A girl with blue dragon(푸른 용과 있는 소녀)〉이라는 제목으로 판타지 장르의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인간 사용자가 용(dragon)에 대해서 언급하면, 인공지능이 이를 받아 다음 단락에서 충성스러운 용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했다. 인간 사용자는 자신이 원하는 용의 묘사가 나올 때까지, 인공지능에게 다양한 판본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인간과 기계, 글쓰기와 글 읽기, 텍스트의 분절과 통합의 멀티턴을 거쳐서 약 10분 만에 한 편의 영문 단편 소설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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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인간과 인공 지능과의 협업으로 약 10분 만에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소설의 저자는 인간인 나일까 아니면 인공지능일까. ‘Shortly A.I.’는 글쓰기 과정 전반에 걸쳐서 ‘너의 글쓰기(Your Writing)’를 강조하면서 자신은 조력자이자 동반자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너’란 다름 아닌 인간 사용자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글쓰기를 배우는 과정은 쉽지 않다. 중고등학교 시절 겪었던, 이른바 빨간펜 선생님의 첨삭은 친절하지 않았으며 심할 때는 예비 작가의 의지를 꺾고 자존감에 상처를 내기도 했었다. 그에 비해 인공지능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글쓰기 과정은 덜 두려웠고 더 재미있었다. 인공지능은 먼저 내가 쓴 텍스트를 정성껏 읽어주고 문법적인 오류를 신속히 수정해 주며, 내가 잠시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이 묘사해 보세요.”라며 격려도 해준다.


 

▣ 인공지능 글쓰기 기계와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최종적으로 우리 연구팀은 이러한 인공지능을 ‘인공지능 글쓰기 기계(A.I. writing machine)’로 명명했다.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My mother was a computer)》의 저자인 캐서린 헤일즈에 따르면, 글쓰기 기계란 컴퓨터 등 기계를 활용해 문학 텍스트를 생성하는 기입 기술이다. 헤일즈에 따르면 이 기술적 장치와 인간 사이에서 역동적 상호작용성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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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서린 헤일스는 '우리가 만드는 것'과 '우리가 무엇인지'는 함께 진화하는 것이며, 서로의 복잡한 상호성을 인정하고 실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캐서린 헤일즈, 이경란 옮김, 아카넷, 2016.


모름지기 ‘이야기란 주고받는 것’이며 ‘글이란 짓는 것’이라는 우리말은 참으로 맛깔나면서도 본질을 꿰뚫고 있는데, 이는 인간과 기계의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소설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필자는 한 편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 씨실과 날실을 엮듯 글을 짓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공지능 글쓰기 기계를 활용해 단편 소설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내가 글을 쓰는 과정 중에서 겪는 고통과 즐거움을 인공지능 글쓰기 기계도 느낄 수 있을까? 한편 인간은 저자로서의 주체성(authorship)을 자각하고 있어서 자신이 쓴 글을 다른 이가 수정하거나 평가하는 것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과연 몇 초 만에 새로운 글들을 바로 제시하고 이를 오차 없이 수정하는 인공지능 글쓰기 기계를 독립적인 창작 주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창작의 주체성, 자율성, 저작권, 평가 등의 문제는 여전히 난제이자 후속 연구 과제로 남아있다. 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인간인 내가 먼저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상상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A girl with blue dragon〉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든 꿈꾸고 상상한 만큼 재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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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원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융합콘텐츠학과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인공지능 스토리텔링 및 인터랙티브 콘텐츠 기획 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저서로는 《앨리스 리턴즈》, 《스토리텔링 전략》, 《호모 나랜스》, 《디지털 게임 스토리텔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