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ol. 25

SPECIAL

[개관 4주년] 헌책방, 잊고 있었던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

최종 리스트 개관 4주년.jpg

 

 

개관 4주년

헌책방, 잊고 있었던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

 

김기태

교수, 〈처음책방〉 책방 지기

 

 

 

 

서울책보고가 문을 연 지 어언 4주년을 맞았다고 하니 초창기 남다른 생각으로 서울책보고를 드나들었던 때가 떠오른다. 서울 소재 헌책방을 한자리에 모아두었다고 해서 작심하고 찾아가 눈 밝은 책 사냥꾼의 시선으로 초판본과 창간호를 포획했었다. 책마다 가격표시가 되어 있어서 별도의 흥정이 필요 없다는 점도 내게는 매력적이었다. 도종환 시인의 대표시집 《접시꽃 당신 초판본도 거기서 구했다. 몇 번을 다녀왔는지 선명하지 않지만 나 역시 책방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발길이 끊어졌다.

 

KakaoTalk_20230323_173449346.jpg

2019년 3월, 서울책보고 개관 기념 전시 <그때 그 책보고>에서 전시 판매 중이던 《접시꽃 당신》 초판본의 사진 © 서울책보고

 

 

이 세상 사람 중에 미리 자기 미래를 내다보며 거기에 맞는 삶을 꾸리는 이가 몇이나 될까. 나도 처음엔 평생 시를 쓰며 살고 싶어서 국문과에 진학했다. 열심히 습작해서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했다. 결국엔 아홉 번 내서 아홉 번밖에 안 떨어졌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하지만… 그러다 출판사에 입사해서 편집자의 삶이 시작됐다. 1988년부터 책을 만들기 시작해서 여러 출판사를 거쳤다. 1990년대 중반엔 대학원에 진학해서 주경야독으로 저작권에 관한 석·박사 학위논문을 썼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저작권 전문가가 거의 없다 보니 자연스레 대학 강단에 서게 됐다. 

 

서울에서도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배회한 적이 있었지만, 시간강사로 전국 돌아다니다 보니 그 지역의 헌책방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내가 만든 책들도 그 안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헌책방과 인연을 맺으면서 기왕이면 특이한 책을 모아보자 마음먹고 초판본과 창간호를 수집하게 됐다. 2001년 충북 제천에 있는 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전임교수(출판학)로 자리를 잡으면서 책 모으는 일도 더욱 순조롭게 진행됐다. 물론 처음엔 일이 이토록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루 이틀,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그렇게 서른 해가 넘어가자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책이 쌓였다. 지역마다 제자들이나 지인이 있어서 책을 보관할 수 있는 거점도 여러 곳에 만들어 뒀는데, 그마저도 포화 상태에 이르다 보니 더는 민폐를 끼칠 수 없어 한데 모으기로 했다. 최근까지만 해도 가족들조차 내가 책을 수집하고 있다는 걸 잘 몰랐다. 책을 집으로 가져 않았을 뿐만 아니라 책을 사는 데 필요한 자금도 월급이 아닌 강연료나 원고료 같은 부수입으로 충당했기 때문이다.

 


P__B8000.jpg

헌책방에 다니면서 기왕이면 특이한 책을 모아보자 마음먹고 초판본과 창간호를 수집하게 됐다. © 김기태

 

2021년 9월, 마침내 학교 근처에 아담한 공간을 찾아 ‘처음책방’을 꾸미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전국에서 가져온 책들을 그해 겨우내 정리했는데, 30년 넘게 수집한 것이라 워낙 방대한 양이다 보니 상자마다 어떤 책이 들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책들을 정리하는 동안, 마치 선물상자를 열 듯이 책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컸다. 상자를 열 때마다 ‘아하, 이런 책도 내가 모았구나!’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을 구매할 때마다 꼼꼼하게 보관해 두어서 상한 것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다행이었다. 

 

P__A7975.jpg

 박스가 많아서 정리가 고되기도 했지만, 선물 상자를 열어 보는 것 같은 즐거움도 있었다. © 김기태

 

2021년 9월부터 2022년 2월까지 대충 정리를 마치고 2022년 3월에 드디어 ‘처음책방’을 세상에 공개했다. 학교와 상의해서 보도자료를 냈는데, 초판본·창간호 전문서점이라는 게 신기했는지, 그것도 개인이 수만 종을 모았다는 게 기특했는지 언론사마다 주목할 만한 기사를 내보내 주었다. 그야말로 대서특필이라고나 할까.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서 각종 잡지와 공중파 방송까지 연일 ‘처음책방’에 관한 내용을 다루어주었다.

 

P__B7883.jpg

처음책방 © 김기태

 

덕분에 책방의 존재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정작 생고생을 하게 된 이는 다름 아닌 나의 아내였다. 내가 학교에 출근해 있는 동안 혼자 책을 정리하고 운영까지 도맡아야 했으니 말이다. 

 

P__B8498.jpg

처음책방 © 김기태

 

그동안 모은 초판본과 창간호는 그 장르와 유형이 매우 다양하다. 문학도서의 초판본뿐만 아니라, 각종 만화잡지와 성인잡지 및 월간지, 주간지 등 잡지류는 물론 수백 종의 일간신문과 지역신문 창간호, 전문서 및 사전류와 각종 참고서의 초판본도 있다. 가장 오래된 책은 육당 최남선 선생이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1910년 10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조직해 조선의 고서(古書)와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려는 계획에 따라 펴낸 《동국통감(東國通鑑)》(1함5책)과 《삼국사기(三國史記)》(2책) 가 있다. 또, 김기림 시인의 시집 《바다와 나비》(1946)를 비롯해서 1951년 전쟁 중에 서울에서 발행된 김소월의 《진달래꽃》, 박목월 시인의 첫 시집 《산도화》(1955), 김윤식 시인의 《영랑시선》(1956) 등과 함께 황순원의 명작 〈소나기〉가 실려 있는 소설집 《학》(1956)과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1961) 초판본도 손님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정기간행물로 월간 〈뿌리 깊은 나무〉와 〈씨ᄋᆞᆯ의 소리〉는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모두 모아 놓았으며, 우리나라 최장수 문예지 월간 〈현대문학〉도 1955년 1월 창간호부터 125호까지 약 10년 치 분량을 모았다. 그밖에 〈문학사상〉 등 문예지 창간호 수백 종, 당대 최고의 지식인 교양지 〈사상계〉 창간호와 폐간호를 비롯해서 〈한겨레신문〉, 〈문화일보〉, 〈국민일보〉, 〈세계일보〉 등 일간지와 스포츠신문의 창간호도 모았다. 〈보물섬〉, 〈만화광장〉을 비롯한 수십 종의 만화잡지도 손님을 맞을 준비를 갖추고 있다.

 

P__A7979.jpg

그동안 다양한 초판본과 창간호를 모았다. © 김기태

 

우리 책방을 찾는 이들이 입을 모아 감탄하는 것은 바로 잊고 있었던 추억을 되살리게 해주는 오래된 책이나 잡지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이라고나 할까. 잊고 지냈던 것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진첩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부모님과 같이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많고, 또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까지 3대가 함께 와서는 할아버지는 아버지한테, 아버지는 아들한테 어떤 책을 설명하면서 세대 간의 소통을 시도하는 정겨운 풍경이 자주 펼쳐진다. 

 

P__B7857.jpg

처음책방 © 김기태

 

 


책방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선량하다. 눈동자에 어리는 책 향과 더불어 매사에 생각하는 삶을 이어온 사람들이기에 함부로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믿음도 묻어난다. 그러하기에 서울책보고처럼 책이라는 보물을 품고 있는 공간들이 늘어나면 좋으련만, 헌책방과 지역 서점들은 점차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단다. 개관 4주년을 축하하며, 서울책보고가 책방의 물결을 퍼뜨리는 거대한 플랫폼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20230323_163047.jpg

© 서울책보고

 

 

 

프로필 섬네일.jpg

 

김기태

교수

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초판본 · 창간호 전문서점 〈처음책방〉책방지기이기도 하며, 

출판평론가, 저작권 및 연구윤리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롯데출판문화대상 심사위원장 및 한국연구재단 연구윤리위원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김기태의 초판본 이야기, 한국 근대잡지 창간호 연구,

소셜미디어 시대에 꼭 알아야 할 저작권, 김기태의 저작권 수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