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25
INSIDE[세렌디피티] B면, 첫 번째 곡
먼저 이 가사집이 들어있던 테이프 이름은 무려 <신세대가요 총결산>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열여덟 곡, 앞뒷면 90분을 꽉 채운 이 가성비갑 테이프에는 어떤 노래들이 들어있었을까요?
나름 이 테이프의 타이틀곡이라 할 수 있는 A면에는 유영진의 ‘그대의 향기’가 수록되어 있네요. 여러분, 이 노래 아세요? 한국가요계에서 R&B의 시초 같은 곡으로, 지금 들어도 무척 느낌 있습니다. 사실 유영진 님은 이후 가수보다는 작곡가로 더 많은 작업을 하셨어요. SM 소속 가수들인 보아, 동방신기, 소녀시대, f(x), 엑소, 레드벨벳 등의 많은 곡이 이분의 작품이었죠.
(감상을 원하시면 클릭)그럼 본격적으로 가사집을 한 번 들여다볼까요?
아직도 난 그대 꿈같은 눈빛 속을 못 잊어 헤메이는데
그대는 가끔씩 향기로 다가와 신비스런 느김으로...
읭?? 느낌이 아니라 느김?? 뭔가 급하게 받아적어 타자를 치신 게 아닌가 의심이 되는 이런 오탈자가 종종 보이는 이 친근한 종이 가사집~!
이 외에도 당시에 그 가사 내용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조관우의 ‘늪’.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에도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었지
하지만 그건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상상속에서만 가능한 법이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뇌피셜 사랑인 걸까요?
1990년대 중반을 강타한 ‘DJ DOC’의 ‘수퍼맨의 비애’... 하지만 이 가사집을 편집한 분은 DJ DOC를 ‘디제이 디오씨’로 읽어야 함을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DJ 독’이라니??
당시 히트곡으로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도 빼놓을 수 없죠. 하지만 당시 이 노래는 두 가지 버전이 있었어요. 소년의 미성이 돋보였던 백동우 버전(kid ver.)과 ‘더 클래식’의 보컬이었던 김광진 버전. 이 가사집을 편집하던 분은 그 보컬의 이름을 강조하고 싶으셨던 걸까요? 백동우 버전 아니고 김광진 버전이야... (잘 보고 사...)
그대의 향기_유영진
늪_조관우
색깔속의 비밀_이승철
수퍼맨의 비애_DJ 독
마법의 성_김광진
WHITE_화이트
요즘 우리는_코코
기억의 습작_전람회
결론_황세옥
쭉 목록을 보고 가사만 읊었는데도 왜 노래방에 가고 싶을까요? 아무튼, 이렇게 A면이 끝나고, B면이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B면의 첫 곡은 어떤 곡이었을까요? 그 주인공은 바로~!
신승훈의 ‘그 후로 오랫동안’이었습니다.
우연인지 몰라도 네가 눈물 흘릴 때마다 하늘에선 비가 내렸어 익숙해져버린 난 그냥 너의 슬픈 눈을 보면서 차가운 한 마디 울지마 하지만 이제 나도 그때처럼 비가 내리면 눈물을 흘리고 있어 내겐 너무나도 소중한 네가 내곁에 없다는 이유로 난 비와 함께 울고 있었던 거야 그후로 오랫동안 비가 왔어 (비) 내리는 비만큼 나도 울었어 하지만 더 견딜 수가 없는 건 어디선가 너도 나처럼 울고 있다는 생각에 하늘이여 나를 도와줘 그렇게 울고 있지 말고 내 님이 있는 곳 너는 쉽게 알 수 있잖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한 번만이라도 그대를 우연일지라도 너를 믿을게 너의 눈물 맞으며
지금같이 스트리밍 형식으로 음원을 듣는 시대와 다르게 카세트테이프 시절의 음악 감상자는 꼼짝없이 수록 순서에 따라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래서 어떤 곡을 어디에 배치하느냐는 테이프 편집자에게 무척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SIDE A의 첫 곡이 무엇이었는지가 가장 중요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 첫 곡만큼 중요했던 선곡이 바로 SIDE B의 첫 곡이었습니다.
왜냐하면 B면은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감상하는 자에게 새로운 국면의 도래이자, 환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니까요. <신세대가요 총결산>은 B면의 첫 곡을 신승훈의 ‘그후로 오랫동안’으로 골랐습니다. 여러분이 혹시 이 곡을 아신다면 이것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아실 거예요. 그야말로 새로운 국면에 어울리는 선곡이자, 띵곡 감상이 필요한 순간에 어울리는 선곡이랍니다.
신승훈 님의 가요톱텐 1위 장면으로 한 번 감상해보시죠.
캬아~ 신승훈 작사, 작곡에 한번 놀라고 음악의 퀄리티에 다시 한번 놀랍니다. 가히 94년에 발표된 음악 중 최고라고 인정하게 되는데요. <신세대가요 총결산>은 이렇게 B면의 선곡에서 총결산의 정점을 찍네요.
뭐, 이토록 예술적인 선곡 순서에 위에서 지적(!)한 오탈자 정도는 봐줄 수 있습니다. 서울책보고 헌책에는 이토록 오래전의 명곡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그런 세렌디피티가 숨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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