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21
INSIDE[북큐레이션 도서 언박싱] 1996년 #시
북큐레이션 언박싱
문고, 베일을 벗다
1996년 생년문고
#시
2022년 9월 19일 인스타그램 업로드
오늘은, 지난가을 ‘절판 시집의 추억’ 전시와 결을 같이 해 만들었던 1996년 생년문고를 언박싱해볼 거예요. ‘시’를 주제로 생년문고를 만들고 싶었는데 마침 1996년의 한 문예지에 이 주제에 너무도 적절한 시가 실려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망설임 없이 1996년 생년문고를 만들었죠!
그럼, ‘시’를 주제로 묶인 1996년의 생년문고를 하나 하나 언박싱 해보겠습니다.
1996년 표제는 제가 읽자마자 반한 시 제목에서 가져왔어요.
제목 자체가 ‘시’!!!
이 시는 평소에 제가 흠모하는 시인이기도 한 L시인의 시인데 그의 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아요.
“‘난해시’, ‘무의미시’, ‘현대 선시’ 등으로 분류되는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한국 시단의 지평을 넓혀온 L.
…기존의 언어 관습과 형식을 거부하고,
시적 대상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초기에는 온건한 메타포를 추구했으나 점차 난해시 쪽으로 옮겨갔다.
그의 이름 앞에는 아방가르드(전위)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그는 문장과 문장(혹은 대상과 대상)의 논리적 연결고리를 과감하게 끊어버림으로써,
자본주의 물신성(fetishism)을 알레고리로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말년에 금강경을 만난 뒤에는 아방가르드와 불교사상을 ‘현대 선시(禪詩)’를 탄생시켰다.
2년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은
‘이제 시는 시를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른다’고 말했다.”
_문학뉴스, 2018.1.17.
이 기사에 따르면 시인 L은 전형적인 시의 문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난해하고 무의미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그의 시는,
누군가에게는 그동안 발화되지 못했던 언어의 발견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제게 L의 시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가 멈칫 멈춰 섰다가 완전히 반한 그의 시 일부를 한 번 읽어볼까요?
L이 1996년 문예지에 처음 발표한 ‘시’입니다.
시
나는 시를 쓴 다음 가까스로, 거의 힘들게, 어렴풋이 발생한다.
나는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 속에 태어난다.
시 속에 태어난다.
시 속에 시 속에 내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시란 무엇인가?
시는 시라는 장르에 속하는 게 아니라 시라는 장르에 참여한다.
참여한다는 건 속하지 않으며 동시에 속함을 의미하고,
시는 시라는 장르에 속할 때, 말하자면 시라는 장르로 일반화될 때 이미 시가 아니다.
우리 시단엔 이런 의미로서의 귀속, 너무나 시 같은 시,
장르라는 일반의 옷을 입고 행세하는 시들이 너무 많다.
일반화된 시는 시가 아니다.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은 시에 의해 시 속에서 시를 향해
시와 싸우며 시라는 길 위에서 헤매는 일이다.
헤맬 때 내가 태어난다.
시가 무엇인가를 알면, 도대체 시가 있다면,
우린 시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반화는 모든 삶의 숨결을 죽인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쓰는, 내가 쓰면서 생각하는 시는
이런 의미로서의 시가 없는 시다.
시가 없을 때 시가 태어난다.
아아 시가 없을 때 시가 없을 때 시가 있다면 시를 쓸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나는 이 시대의 문학이라는 이름의 유령과 싸운다.
(후략)
뒷부분을 생략했는데도 무척 긴 시입니다.
그런데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뼈를 때리네요.
그중에서도 마지막 인용 문장이 그렇습니다.
“나는 이 시대의 문학이라는 이름의 유령과 싸운다.”
패기 넘치는 놀라운 구절입니다.
“일반화는 모든 삶의 숨결을 죽인다.”라는 구절에서는 어떤 예술론을 엿볼 수 있고요.
L시인이 산문시에서 구구절절 논한 #시론 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 생년문고를 선택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이 아방가르드한 시를 쓴 시인은 이승훈 시인이고요. '시'라는 시가 실린 문예지는 <문예중앙> 1996년 가을호입니다.
이 외에도 양귀자, 오정희, 이승우 등의 작품이 실려 있는 문학상 수상 작품집 한 권,
이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96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곰 이야기》(현대문학)입니다.
황현산, 정현백 등의 비평이 실려 있는 문예지 한 권,
이 문예지는 <창작과 비평> 91호이자 1996년 봄호입니다.
현대문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쓴 시집 한 권까지 네 권이 들어있습니다.
이 시집은 유진택의 《아직도 낯선 길가에 서성이다》(문학과지성사)입니다.
1996년생인 당신, 아니면 1996년생 지인을 둔 당신,
혹은 1996년에 ‘시란 무엇인가’ 물었던 시인을 만나고 싶은 당신,
한 번 주문해 보시겠어요?
시를 주제로 구성한 1996년의 생년문고는 ‘시’라는 단 하나의 주제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두께는 아주 두툼했던 문고였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분이 많이 찾으시는 서울책보고답게 이 생년문고도 금방 주인을 찾아간 건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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