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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6

SPECIAL

[오은의 오늘의 시] 헌책_접힌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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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접힌 자국

 

 

                     오은


 


헌책에는 접힌 자국이 있다


의견을 접듯

한발 물러서는 태도로

잘못을 접듯

어깨를 두드리는 자세로


한 수 접고 두는 바둑 기사 앞에서처럼

때로는 몸을 낮추어가며


페이지의 끄트머리를 접었을 것이다


너무 성급하게 접는 것은 아닐까?

접었다 다시 펼 때는 흔적이 남겠지?

접을까 말까 망설일 때


흐르던 이야기는 잠자코 고여 있다


접히는 순간,

편평했던 때를

빳빳했던 상태를 

완전히 이탈하게 되는 이야기


헌책에는 으레 접힌 자국이 있다


그리고 어떤 헌책에는

접힌 자국이 아주 많다


무수한 분기점처럼


내가 가르지만

내 세계가 갈라지고 말 때

내가 접었지만

정작 접힌 것은 눈주름일 때


구석에만 깃드는 어떤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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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시인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