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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40

SPECIAL

[숲노래의 어제책 이야기] 숲노래의 어제책 이야기 - 스물 아홉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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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의 어제책 이야기 

헌책·옛책·손빛책으로 읽는 오늘 

스물 아홉 번째 이야기

 

 

 최종규(숲노래)

작가

 

 

Emotion Icon 숲노래의 어제책 이야기 <헌책·옛책·손빛책으로 읽는 오늘>은  

헌책을 좋아하는 이가 들려주는 헌책 서평입니다.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

 

 

 

 

 

하루하루가 힘들 적에는 “아! 언제까지 이런 날(일상)을 이으려나!” 하면서 고달프게 마련이다. 고달픈 하루를 ‘아예 없는 날’로 여기기는 어려울 만하다. 그런데 “그래! 이렇게 고단한 날은 나를 늘 새롭게 가르치면서 신나게 이끌려는 날일는지 몰라! 가시밭길도 꽃길도 모두 내 삶길로 여기면서 노래하자!” 하고 마음을 살그마니 돌린다면 어느새 이 하루(일상)를 새롭게 맞아들일 만하지 싶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에도, ‘입시지옥’이 서슬퍼렇던 때에도, 그저 그냥 그렇게 책 하나를 곁에 두면서 “오늘 즐겁게 누릴 이야기를 생각하자”고 보내면서 곁에 두던 책 몇 가지를 새삼스레 들추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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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총서 : 생활과학》

과학기술처 엮음

한국과학기술진행재단·마을문고본부

1981.6.15.

 

 

  어릴 적을 돌아보면, 우리 어머니는 따로 책을 읽을 틈이 없는 나날입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쉬잖고 갖은 일과 살림을 맡아야 했습니다. 이웃집 아주머니나 할머니도 매한가지입니다. 흔히 ‘집순이(가정주부)’로 여깁니다만, 집을 지키고 돌보고 가꾸려고 어마어마하게 땀을 쏟습니다. 우리네 아버지가 ‘집돌이’로 지내는 삶이라면, ‘육아지옥’이나 ‘가사분담’이란 말이 없었을 만하다고 느껴요.

  아이를 함께 낳고 같이 돌보고 나란히 가르치는 길이라면 보금자리에 사랑이 피어나거든요. 집안일을 이리저리 가르지 말고 아버지를 비롯한 사내들이 스스럼없이 맡을 적에는 새롭게 깨닫는 손길과 눈빛이 자라게 마련입니다. 저는 어머니 심부름을 끝없이 했고, 집안일을 언제나 거들었는데, 나중에 어버이란 자리에 서서 두 아이를 돌보는 길에 “어릴 적 심부름과 집안일 함께하기”가 얼마나 크게 이바지했는지 새삼스레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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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을 총서 : 생활과학》을 어린배움터(국민학교)에서 자주 구경했습니다. 《생활과학》을 닮은 책은 지난날 ‘여성잡지 별책부록’으로 곧잘 나오기도 했습니다. 《생활과학》 같은 곁책(별책부록)이 나오는 달이면 ‘여성잡지 사오는 심부름’을 하러 마을책집으로 달려가서 줄을 섰습니다. 우리 어머니뿐 아니라, 이웃 아주머니도 이런 책을 얻으려고 애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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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1980년대에는 몰랐는데, 이 책에 담은 줄거리나 그림이나 사진은 거의 다 일본책을 베끼거나 훔쳤더군요. 나중에 헌책집에서 ‘일본에서 나온 생활과학’ 책을 하나둘 찾아보고서 알아챘고 놀랐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루를 살아내면서 우리 나름대로 우리 손길로 가다듬고서 가꾸는 우리 살림글을 여밀 만할 텐데, 왜 굳이 일본책을 슬쩍 베끼려 했을까요? 더 잘하거나 잘난 살림은 없다고 느껴요. 작고 수수하고 흔헌 곳에 참하면서 곱고 흐드러지는 샘물처럼 빛나는 살림꽃이 피어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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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총서는 정부 보조로 제작하여 전국 마을문고에 무상 기증하고 있는 비매품(非賣品)입니다.

- 마을문고 회원이 희망할 때는 본회 자금으로 제작한 재판본을 반포실비(권당 300원, 우송료 포함)만으로 배본하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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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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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23호》

윤구병 엮음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

1978.1.1.

 

 

  예나 이제나 ‘모르는책’이 많으니, 새책집이나 헌책집으로 마실을 갈 적에는 늘 ‘모르는책’을 들춥니다. 글쓴이나 펴냄터를 모를 적에 오히려 눈이 갑니다. 어디에서도 책이름을 들은 적 없을 뿐 아니라, 여태 어느 누구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모르는책’에 먼저 눈이 갑니다. 모든 ‘모르는책’은 문득 궁금해서 손을 내밀어 들출 적에는 ‘아는책’으로 바뀝니다. 누구나 알아보는 책은 아니더라도, 바로 내가 내 나름대로 알아보고 살펴서 헤아리는 ‘아는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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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깊은 나무》도 처음에는 ‘모르는책’이었습니다. 1980년에 전두환 씨가 싹뚝 잘라내는 바람에 더 나올 수 없던 달책(월간잡지)인데요, 열여덟 살이던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인 1992년에 찾아간 헌책집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 무렵 ‘훈민정음’을 배울 적에 들은 “뿌리깊은 나무”라는 말을 책이름으로 삼았네 싶어 궁금했고, 휘리릭 펼치면서 그저 놀랍고 새롭고 대단했습니다. ‘1976년에 이런 글을 실어서 냈다고? 1980년에 이미 이런 글을 싣다가 총칼에 꺾였다고?’ 하는 혼잣말을 하면서 벅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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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에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를 그만두고서 책꾼(책마을 일꾼·출판사 직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때 저를 뽑은 분이 ‘뿌리깊은 나무 엮음빛(편집장)’이던 윤구병 씨인 줄 나중에 알았고, 이녁은 《보리 국어사전》 엮음빛으로 저를 앉히기도 했습니다. 함께 일하며 자주 말을 섞고 만나는 동안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는 대목을 새록새록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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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구병 씨는 저한테 곧잘 “종규야, 이 책 좀 찾아줄 수 있니?” 하고 물었고, “그 책요? 헌책집을 다니면 이레도 안 되어 누구나 찾을 텐데요?” 하고 시큰둥히 대꾸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찾는다고? 난 이십 년이 넘도록 못 찾았는데?” 하시기에, “그야 선생님이 날마다 책집마실을 안 하시니 못 찾을밖에요. 헌책집에 날마다 가더라도 ‘아는책(눈에 익은 책)’이 아니라 ‘모르는책’을 모조리 끄집어서 들추면 이레가 아니라 사흘 만에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고 시큰둥히 여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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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에도, 1999년에도, 2001년에도, 2024년에도, 저는 늘 ‘모르는책’을 살펴서 챙기고 읽으려고 합니다. 새롭게 배우면서 스스로 밝게 말하는 즐거운 마음이고 싶기에, 뿌리도 깊고 샘도 맑은 넋이고 싶기에, 푸르게 일렁이는 바람을 가만히 맞아들이는 책읽기를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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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규(숲노래)

작가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쓴다. 

사전 쓰는 길에 이바지하는 책을 찾아 헌책집-마을책집을 1992년부터 다닌다.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쉬운 말이 평화》,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곁책》들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