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40
SPECIAL[밑줄의 일부] 발레와 헬스, 몸에 대한 발견 <하나와 앨리스>(이와이 슌지, 2004)
이지혜
<밑줄의 일부>는 영화와 드라마, 문화현상의 인문학적 고찰에 대한 에세이가 담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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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말, 연구실 문을 가만 열고 조용히 빠져나와 회기역 앞 PT샵(퍼스널트레이닝샵)을 찾아갔다. 그 PT샵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직장과 가까웠고, 간판의 색이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순한 이유로, 혹은 충동적으로 선택한 것들이 삶 전체를 바꿀 때가 있다.
▶ 운동하는 모습 ⓒMBC드라마 <역도요정 김복주>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와 김복주라는 캐릭터를 무척 좋아한다.
일상의 재발견
사실 나는 운동을 싫어했다. 싫다기보단 무서워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성적표를 받아 들면 체육 점수는 늘 0점에 가까웠다. 늘 내 몸을 움직이는 게 무섭고 귀찮았다. 다쳐서 집에 가면 부모님을 걱정시킬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울었다. 뜀틀이 무섭다고 울고, 철봉에 매달리기 싫다고 울었다. 나는 공 던지기보다 그저 나무그늘 아래에서 가만히 앉아 책 읽는 걸 좋아하던 그런 애였다. 그렇게 서른 해를 좀 넘게 살았는데 운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논문을 쓰다 귀가하던 한 여름 저녁, 급성 신우신염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것이다.
당장이라도 입원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의사 선생님께 "안 돼요. 저 박사논문을 쓰고 있어서 입원은 못 해요."라고 말하며 정신을 잃었다. 나는 그대로 열흘을 꼬박 간호통합병동에 입원했다.
내리 항생제를 맞아야 했던 그 열흘. 그러나 병원 일정에 맞춰 반강제로 규칙적인 삼시세끼를 먹고, 같은 입원실 동료들과 함께 정해진 시간에 자야 했던 그 열흘. 내 몸을 구성하던 형편없던 수치들이 아주 조금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아침 회진 때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환자분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나도 겪어봐서 알지만, 이렇게 건강을 잃으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네. 몸이 이렇게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있는데,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른 분야의 박사가 되면 뭐 할 건가?"라고 말씀하시며 빙긋 웃으셨다. 부끄러웠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 중 내 마음에 와 박힌 것은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였다.
내 몸 하나 알지 못하면서 한 분야의 박사가 되어봤자 무슨 소용이지? 이런 내가 누굴 가르치고 글을 쓸 수 있지? 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오랜 성찰 끝에 나온 답은 병원 생활에 대한 감상이었다. 인생의 일부분, 그 부분에서 중요한 과업을 내려두고 생각해 보면 규칙적으로 지낼 수 있었던 병원 생활이 퍽 좋았다. 정갈하고 소박한 음식을 제때 먹고, 장마철 창밖의 하늘과 나무와 빗방울을 마음껏 구경하고, 걷고 싶을 때 걸을 수 있는 것. 내 삶의 어느 정도는 목표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제어하고 있다는 느낌이 머리를 명징하게 했다. 나는 나의 일상을 다시 구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안된다고, 나는 못한다고 생각한 일들을 아주 단순하게 삶에 편입시키기로, 그러니까 나를 알기 위해, 내 몸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 근성장을 위해선 쉬는 시간이 필수다.
일상에도 쉬는 시간은 필수다. ⓒMBC드라마<역도요정 김복주>
운동의 재발견
운동을 배운 지 꼬박 1년, 그 사이 헬스장은 두 번 바뀌었고, 네 명의 선생님을 만났다. 덤벨 2kg은 커녕 1.5리터 생수 한 병도 들기 어려워했던 나는 1년 사이 6개들이 생수 한 세트와 10kg 고양이 모래를 양손에 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다이어트는 실패했지만, 눈에 띄게 건강해졌다. 거쳐온 공간과 사람들을 통해 배운 운동은 무서운 것이 아니었고, 어렵고 재밌는 것이었다. 쪼그려 앉는 것조차 바른 자세가 있다는 것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다.
파란색 간판이 좋다는 이유로 등록했던 PT샵을 그만두고 대형 헬스장으로 옮긴 이유는 운동이 습관이 되기를 원해서였다. 열심히 배우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습관이 되진 못했고, 혼자 운동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주말에도, 밤늦게라도 배운 운동들을 복습해 볼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왔고 새 공간을 기웃거리며 한동안 이 기구, 저 머신을 만져봤다. 늘 들었던 덤벨도 새 공간의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또 낯설고 어려웠다. 그래도 아닌 척 이것저것 체험해 보자고 다시 마음먹었다. 옮긴 헬스장은 GX룸이 따로 있어서 일과에 맞춰 다양한 그룹수업을 운영했다. 일부러 이용권을 끊고 한 번씩 들어봤다. 그러한 와중에 발레(발레핏)를 발견했다.
▶ 이와이 슌지 <하나와 앨리스>(2004) 스틸 컷 ⓒ네이버 영화
나는 발레를 영화로 알았다. (물론 직업상 대부분 사회지식을 책과 영화로 배우긴 했다.) 물론 그런 예술 분야가 있다는 건 진작에 알았지만 발레는 나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장르였다. 발레를 '발레'로서, 아름답고 멋있는 운동이라고 인지한 건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하나와 앨리스>가 한국에 개봉한 이후였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하나와 앨리스>(2004)는 10대 소녀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청춘 영화로 알려져 있다. 하나와 앨리스는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로 서로의 일상을 대부분 공유하는데, 이 과정에서 둘은 미야모토라는 남학생에게 동시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나는 미야모토를 따라 만담 동아리에 가입하고, 앨리스는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발레 동아리에서 꾸준히 발레를 한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 앨리스는 인생에 있어 어쩌면 첫 홀로서기가 될지도 모르는 오디션장에서 자신을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발레를 선택한다. 발레는 전용 천슈즈나 토슈즈 없이는 추기 어려운 춤이지만, 앨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디션장에 있던 종이컵과 박스테이프를 이용해 토슈즈를 만들고 멋지게 외발로 서는 동작을 해낸다.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라는 이유로 아무런 내용도 모른 채 극장에 가 앉아 스크린을 멀끔히 바라보던 두어 시간 말미, 주인공 앨리스의 춤과 고정된 동작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동작의 이름이 '아라베스크'라는 것을 알았다. 얇고 우아한 몸태를 가진 사람이 낭만적인 음악에 맞춰 출 수 있는 아름다운 춤.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꼬박 이십 년이 지났다.
몸의 재발견
영화에서 앨리스가 해낸 아라베스크는 한 발로 땅을 온전히 디디고서, 다른 다리와 뒤쪽으로 멀리 뻗고 시계처럼 몸을 숙이는 자세다. 단순히 숙이는 것이 아니라, 온몸 근육 구석구석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 있어야만 한다.
"저 같은 사람도 발레 수업 들어도 돼요?" 질문이 이상하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얇지도 우아한 몸태를 가지지 않았다. 세상 모두가 발레와 어울린다고 해도 내 머릿속에서 나는 발레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영화에서 봤는데, 아라베스크를 해보고 싶어요." 내가 말하자 선생님은 기쁘게 웃었고,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당연히 가능하다고 말하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고작 GX수업일 뿐이라고 해도 나는 좀 진지했다.
처음 발레바를 잡고 거울에 몸을 비췄다. 울퉁불퉁한 몸이 우스꽝스러웠다. 최대한 거울에 비치는 몸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선생님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1번 발, 2번 발, 3번 발, 발 모양을 배우며 정신없이 웃었다. 그리고 첫 수업이 끝나고서 좀 당황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혼자서 잘 서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발 모양을 하기 위해선 우선 제대로 서야만 했는데, 선생님이 알려주신 서는 법은 기존에 내가 선 자세와는 달랐다.
발레는 비뚜름하게 힘을 풀고 서서 시작하는 운동이 아니라, 내 몸 구석구석에 힘을 보내 쓰지 않는 근육들을 깨우고 손끝부터 발끝의 모양까지 온전히 집중해서 서야만 내가 원하는 위치에 몸이 가 닿을 수 있는 운동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사지의 말단부터 엉덩이, 허리까지 꼿꼿하게 세우고 몸의 정렬부터 사방 거울로 맞춰야만 했다. 그냥 바를 잡고 서 있었을 뿐이었는데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물었다. "선생님 원래 그냥 서 있는 게 이렇게 힘든 걸까요? 저 빼고 다 이렇게 힘을 주고 서 있는 거였어요?“
다음날 몸살이 났다. 나는 발레 수업에서 고작 제대로 서는 연습을 했을 뿐이었다. 바르게 설 줄도 몰랐다는 사실이 많이 충격이었다. 나 좀 멍청한 거 아닐까, 이 상태로 운동을 배워봤자 아무 소용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른 수업에 들어갔다. 멍하니 동작들을 따라 하다 헐떡이며 잠시 쉬는 동안,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운동들을 알려주시던 점장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른 건 몰라도 헬스는 재능이 없어도 할 수 없는 운동이에요. 그냥 꾸준히 매일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새 늘어납니다. 성실하기만 하면 됩니다.“
▶ 이와이 슌지 <하나와 앨리스>(2004) 스틸 컷 ⓒ네이버 영화
사소하게 성실한 일상
그 순간 일 년 전, 병원에 누워 있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된다고 믿으며 한 가지만 보면서 돌처럼 굳어가던 때. 그런데 생각보다 정말 아무것도 못 하게 되었던 순간. 그래서 결국 인생의 목표와 상관없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일들을 해보자고, 할 수 있다고 믿고 움직였던 그때의 내가 떠오른 것이다. 난데없이 헬스를 배워보겠다고 선언하고, 그래서 진짜로 PT샵에 등록해 덤벨을 잡고, 봉에 원판을 끼우며 무게를 들어보고, 키보드와 마우스 대신 쇠를 잡아서 거칠어진 손바닥에 연고를 바르던 내가, 결국 나와는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던 발레봉을 잡게 되기까지 사소한 매일의 순간순간이 아날로그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앨리스가 해낸 아라베스크는 한 발로 땅을 온전히 디디고서, 다른 다리와 뒤쪽으로 멀리 뻗고 시계처럼 몸을 숙이는 자세다. 단순히 숙이는 것이 아니라 온 몸 근육 구석구석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 있어야만 한다.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조금은 수업을 들어본 나는 이제 안다. 이 자세를 해내려면 몇 년은 걸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제대로 서는 법을 배웠고 익혀야 할 것이다.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제일 중요한, 홀로 제자리에 잘 서는 법에 익숙해져야 한쪽 다리를 뻗어 멀리 보낼 수도, 양손도 다르게 뻗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실해질 필요가 있겠다고, 아주 단순하게 성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오늘도 운동을 간다. 언젠가 결국은 아라베스크가 하고 싶고, 아라베스크를 할 수 있는 박사이자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지만, 지금은 불가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날은 헬스를 하고 어떤 날은 발레 수업을 듣고, 어떤 날은 달리기를 한다.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일들이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의 건강한 기반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제대로 서는 법부터 다시 연습해야지. 매일 조금씩. 삶 속에서 내가 견인할 수 있는 최소의 성실함을 조금씩 발견하고 밑줄을 긋는 중이다.
💌 끝으로 발레와 관련해 ‘서울책보고’에서 구매할 수 있는 책 몇 권을 추천하고 싶다.
▶ 임혜경, 《서 있기만 해도 라인이 살아나는 데일리 발레 클래스》, 북스토리, 2014 (동화마을6, 3000원)
▶ 임혜경, 《데일리 발레 클래스》, 북 스토리 2014. (대광서림1, 5000원)
▶ 한영, 《여배우 홈 발레 스트레칭》, 김영사, 2018. (서적백화점3, 7000원)
이지혜
영화평론가 / 문화평론가
영화전문매체 〈코아르Coar〉(클릭하면 이동)에 영화 평론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국내판) 웹진〈문화톡톡〉(클릭하면 이동)에 문화 평론을 매월 고정 연재하고 있다.
2023년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계열 박사과정생 연구지원금 수혜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소속으로 한국문화콘텐츠 연구자로도 활동 중이다.
▷문화전문매거진 《쿨투라》 제 16회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2022)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전북부문 심사위원(2023)
▷서울역사영화제 프로그래머(집행위원)(2024)
✉ leehey@khu.ac.kr
인스타그램@leehey_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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