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36
SPECIAL[밑줄의 일부] 처음이라는 거짓말과 끝,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
이지혜
<밑줄의 일부>는 영화와 드라마, 문화현상의 인문학적 고찰에 대한 에세이가 담긴 코너입니다.
영화 <어바웃 타임>(리처드 커티스, 2013)의 주인공 팀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시간여행 능력은 꽤 까다로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 미래로는 갈 수 없고, 과거로만 갈 수 있다. 과거를 조작해 팀 자신의 ‘지금’, 즉 과거에 대한 결과값인 ‘현재’를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에 흔적을 남기거나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심지어 팀이 가진 시간여행 능력을 사용하려면, 좀 구차해져야 한다. 우선 벽장이나 화장실 등, 아무도 팀을 볼 수 없는 공간에 숨어야 한다. 그리고 꼭 두 주먹을 질끈 쥐고, 눈을 감아야 한다. 그 상태로 과거를 떠올려야 한다. 그것도 아주 선명히 기억나는 과거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동할 수 있다.
영화 초반 팀이 능력을 써서 돌아가는 시점은 고민도 없이 나쁜 과거다. 예를 들어 ‘처음’이라 실수가 만발했던, 찌질의 순간으로 여행하는 것이다. 그는 실수의 순간을 바로잡아, 없던 일로 만들고 싶다. 그래서 흠결 없이 완벽한 현재를, 성공의 기억으로만 가득한 날들을 가지고 싶은 듯 보인다.
▶ <어바웃 타임>(2013) 공식스틸 ⓒ네이버영화
처음이라는 기대
처음은 참 특별하다. ‘처음’이라는 명사나 ‘첫’이라는 관형사가 붙은 말은 사람을 기대하게 만든다. 첫날, 첫시작, 첫사랑, 첫만남 같은 단어들이 특히 그렇다. 특히나 ‘첫’만큼 사람을 게으르고 비겁하게 만드는 접두사도 없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자주 “처음”이라는 말 뒤에 숨었다.
평가를 앞둔 사람들은 ‘처음’이라는 단어에 유독 약하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다음에 잘하면 돼.”라고 반응하는 것을 유심히 봤다. 그러니까 나에게 ‘처음’이라는 말은 팀의 시간여행과 같은 능력이었다. 마치 콘솔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캐릭터가 미션에 실패했을 때, 동전을 넣으면 일정 부분 과거로 돌아가 망친 현재를 되돌릴 수 있는 기분이 나도록 만들어 주는 기회의 단어였다.
불리해지면 “처음”이었다고 거짓말했다. 어떤 일을 하다가도 좀 어려울 것 같으면 “나 이거 처음 해”라고 거짓말했다. 그러다가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했다. 타인을 향해 내뱉는 ‘처음’이라는 명사를, ‘첫’이라는 접두사로 바꿔 나 자신에게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식이었다. 좋아하는 책을 필사하기 위해 노트를 산다. 노트에 문장을 열심히 옮겨 적기 시작한다. 펜을 바꿔가며 온 힘을 다해 또박또박 옮겨쓴다. 거기까진 좋았다. 늘 중간부터가 문제였다. 열심히 써놓고 오탈자를 내거나, 실수로 비뚜름한 선을 긋는 찰나면, 그러면 그때부터 전부 하기 싫었다. 지우고 계속하면 되는걸, 지운 자국이 남는 게 싫다는 핑계로 아예 기록하기를 포기했다.
그러니까 나는 조금의 실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나온 시간에 실패의 흔적이 남는 게 지독하게 싫었던 것 같다. 그것은 ‘끈기 없음’으로 귀결되었고, 나는 자꾸만 가짜 ‘처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의 그런 결함이 드러날 때마다 할 수 있다면 “처음”이라는 거짓말을 사용했다. 예컨대 무언가 배우는 동안, 지질하게 노력해 좋은 결과가 따를 때도 ‘처음’이라는 말을 곁들였다. 그렇게 하면 부족하고 구차했던 과정은 흔적도 없이 원래 똑똑하고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일을 할 때도 그랬다. 나의 미숙함으로 좋지 않은 결과가 발생하면 ‘처음’을 덧붙였다. 그러면 잘못을 덜 인정하고, 좀 더 속상해하며 스스로를 위무해도 될 것 같았다. 인간관계도, 특히 연애에 있어서는 더 그랬다. “이렇게 좋아해 본 건 네가 처음이라 그래. 그래서 자꾸 내가 안 하던 행동을 해보려니까 실수를 하나 봐.” 같은 거짓말을 했다.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해야만 할 때 자존심을 세우며 ‘처음’이라는 핑계를 댔다.
지속하는 마음
서울책보고 웹진
주름도 잡히지 않은 유백색 종이를 애꿎게 뒤적이다가, 나는 결국 새 책을 덮었다. 그리고 서재의 책장을 이 잡듯이 뒤지고 펼쳤다. 무언가 글감을 발견하기를 애타게 바랐다. 수많은 책등 사이를 훑어보던 중 색 바랜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한 면의 반도 채우지 못한 페이지만 가득한, 오래된 필사 노트였다. 이걸 언제 샀더라? 기억도 까마득한 노트를 펼치고 쓰다가 망쳤거나 엉망진창으로 쓰여진 글귀가 가득한 페이지들을 따라 읽었다.
▶ 필사 흔적 일부 ⓒ이지혜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메모 귀퉁이에서 시선이 멈췄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를 여러 번 되뇌다 한숨이 났다. 오래전 나는 이 문장을 무척 좋아했다. 아주 좋아해서 따라 적었고, 따라 적다가 망쳐서 짜증이 났던 기억이 있다. 쪽수를 쓰지 않은 문장이 노트에 엉거주춤 적혀있었다. 과거의 나야, 과거의 찌질했던 나야, 좀 계속 쓰지 그랬어. 되뇌었다. 이 문장이 누구 것인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한참을 책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곱씹던 중 ‘끝’이라는 단어가 번뜩 떠올랐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이건 김연수의 문장이었다.
끝은 노력의 결과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소설가 김연수가 200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동명의 단편소설집으로 2009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주인공 ‘나’는 우연히 도서관 이용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진행하는 독서모임 ‘함시사(함께 시를 읽는 사람들)’에 참여한다. ‘나’는 그 모임을 통해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시를 발견하고, 시의 한 구절인 “호수를 바라보며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라는 구절에 첫눈에 끌려 메타세콰이어 나무에 대한 자연과학서를 빌렸다가 시인이 남긴 글귀와 마주친다. 이제 고작 스물다섯이 된 ‘나’의 멋없고 구차한 첫 시도들은 우연 같은 발견들과 엮여 삶의 계기가 된다. 나아가 ‘나’의 고군분투한 기록은 ‘함시사’의 회원 ‘희선씨’의 사연과 톱니바퀴처럼 연결된다.
‘이 시에 나오는 여자친구가 누구니?’ 그랬더니 ‘착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더라구요. ‘아휴, 당연히 착하겠지. 얘기해봐. 어떻게 만났는데?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지?’ 내가 물었죠. ''맞아요. 그렇게요. 세상의 끝까지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요.' (78쪽)
▶ 바래진 흔적을 전달하기 위해 색 보정을 하지 않았다 ⓒ이지혜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내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세계의 끝으로 가고 싶어 했고 그 사실을 암호처럼 남겨뒀다는 사실을 공유하며 시인의 과거를 뒤쫓는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시인이 말한 세계의 끝이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는 호숫가의 메타세쿼이아 나무 한 그루 근처였다는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87쪽)
책장 뒤편 구석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던 책, 《세계의 끝 여자친구》(김연수, 2009)을 집어 올렸다. 먼지 쌓인 분홍 표지를 가만히 쓸어내고, 쪽수가 적히지 않은 문장을 찾기 위해 페이지를 뒤졌다. 본문에서 아무리 톺아보아도 ‘따라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맨 뒷장을 펼쳤다. 노랗게 변색된 종이의 질감이 거칠었다.
초판인쇄│2009년 9월 2일
초판발행│2009년 9월 8일
2009년 9월의 나는, 새 학기를 맞이한 학부생이었다. 쓰는 삶을 직업으로 갖고 싶어서 간절하게 소설을 사 모으던 문청이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집을 기다리고, 초판이 나오길 기다려 구매한 후, 문장을 필사하며 습작을 한 학생이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고 지우다, 수십 개의 노트를 펼쳤다가 구기며 알 수 없고 기약도 없는 미래 때문에 자주 괴로워했다. 처음 맞이하는 가을 학기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겨울에 투고한 원고의 낙방 소식을 봄에 들었고, 여름에 투고한 원고의 낙방 소식을 가을에 들었다. 수많은 ‘처음’이 있는 1월과 9월은 그래서 더 잔인한 달이었다. 필사노트를 발견하고, 김연수의 책을 건져 올리고, 책의 발행일을 마주할 때까지 간절했던 기억을 잊고 살았다.
▶ 김연수 단편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 초판 판권지 ⓒ이지혜
판권지를 내려다보다 책을 덮었다. 김연수의 문장이 아니었던 건가? 생각하며 책을 뒤집은 찰나였다. 거짓말을 보태 대문짝만하게 내가 찾던 문장가 비슷한 문장이 박혀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내가 찾던 문장은 본문이 아니라 작가의 말이었다. 가만히 문장을 곱씹어 생각했다. 이 책의 초판을 사서, 문장 하나 하나를 아주 귀하게 여기며 유백색의 표지를 넘겼을 2009년의 나를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나와 내 꿈을 아주 사랑하고 있었다.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구차하고 막막한 순간들을 견디며 노력했다. 그때의 내게 처음보다 중요한 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었다. 조금 엉망이라고 해도 결말을 보겠다는 의지가 우선이었다
이 글의 중간쯤 나는 또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이렇게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처음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사실 처음이 아니다. 어떤 원고를 쓰든 구차하고 찌질하게 괴로워하면서 쓴다. 잘 쓰고 싶고,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 잔뜩 긴장한 채로 쓴다. 기준은 높은데 문장이 마음만큼 나오지 않는 때가 태반이라 책상에 머리를 박고서 쓰고, 간신히 초고를 만들고 나면 수십 번 고친다. 그러므로 ‘처음’이라는 거짓말을 하는 건 이 원고로 끝이다. 나는 이제 처음이 아닌 게 창피하지 않다. 처음이 아니라는 건, 익숙해지기 위해, 잘하고 싶어서 고군분투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2009년의 나는, 처음의 나는 그걸 알았다.
아르케(arche)는 '처음'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고대 자연철학에서는 아르케를 '원리' 혹은 '원인'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했다. 즉 아르케는 모든 일의 처음, 시초를 의미하는 단어다. 처음은 끝과 맞닿아 있다. 처음의 ‘나’ 덕분에 밤새 원고를 붙잡았고, 이제는 헐어버린 책 덕분에 겨우 결말을 냈다.
*추신: 하루에 한 장, 이 책의 전부를 필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망치더라도 멈추지 않고, 엉망이어도 찍찍 그어가며 필사할 것이다. 이건 이 글을 읽은 사람과 나, 즉 우리만 아는 약속이다. 밑줄의 일부가, 전부가 되는 날이 언젠가 오길 바란다.
이지혜
영화평론가 / 문화평론가
영화전문매체 〈코아르Coar〉(클릭하면 이동)에 영화 평론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국내판) 웹진〈문화톡톡〉(클릭하면 이동)에 문화 평론을 매월 고정 연재하고 있다.
2023년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계열 박사과정생 연구지원금 수혜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소속으로 한국문화콘텐츠 연구자로도 활동 중이다.
▷문화전문매거진 《쿨투라》 제 16회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2022)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전북부문 심사위원(2023)
▷서울역사영화제 프로그래머(집행위원)(2024)
✉ leehey@khu.ac.kr
인스타그램@leehey_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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