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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7

SPECIAL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 대혼돈의 멀티버스,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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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돈의 멀티버스, '인간관계'

 

 

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Emotion Icon영화학 박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필자가 영화와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는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우리 때 반장선거는 인기 투표나 다름없었다. 공부를 잘하고, 옷을 잘 입고, 재미있는 애들이 표를 많이 얻었다. 공부를 잘하면 교사들의 총애를 받았고, 옷을 잘 입으면 인물이 훤해 보였으며, 재밌으면 주변에 항상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 보면 뭐, 리더십이나 성실성, 봉사 정신까지 따질 만한 자리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돌아보면 공부도 잘했고, 인물도 훤했지만(!) ‘재미있는’ 아이는 못되었던 것 같다. 대학교 과 대표를 포함해서 임원에 선출된 적은 겨우 한 손에 꼽힐 정도다. 권력욕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 끄는 매력,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나를 꽤 서글프게 만들었다. 우리 시대에는, 특히 프리랜서들에게는 그게 곧 밥벌이로 연결되기도 하므로 그 아쉬움은 여전히 내 마음속 한켠에 남아있다. 예전에는 도화살이 있다고 하면 기생 팔자라고 업신여겼지만 1인 크리에이터의 시대에는 그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모양이다. 


그래, 인기라는 건 사주팔자처럼 타고나는 건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본격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인기가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나누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인기가 많은 아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을 풍겼고, 친화력이 좋아서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또래들 뿐 아니라 교사나 부모님들도 쉽게 자기 편으로 만들었던 걸 보면 누구와도 관계 맺기를 잘했던 것 같다. 인기가 많다는 것과 인간관계가 좋다는 말 사이에 등호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대체로 좋은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이 옆에 사람이 모이게 되는 법. 즉, 인기의 필요조건으로서 좋은 인간관계가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은 후천적으로라도 사람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들을 시도해 봐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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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은 인간 관계의 핵심을 꿰뚫으며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 


데일 카네기의 고전, 《인간관계론》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에 한창 관심이 많았던 20대 중반에 읽었던 책이다. 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지펴질 때쯤 초판이 나온 책이지만, 인간의 본성은 변한 것이 없으니 인간관계론도 동시대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독자를 가장 혹하게 만드는 제목의 챕터는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6가지 방법일 것이다. 그 방법인즉슨,

 

1)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라. 

2)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웃어라. 

3) 상대방의 이름을 기억하라. 

4) 경청하라. 

5) 다른 사람의 관심사에 맞춰 이야기하라.

6) 다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들어라.

 

등이다. 사실 비슷한 말이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고, 대부분 직,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들이기도 해서 특별한 비법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천론으로 들어가면 달라진다. 나이가 들수록 내 삶의 문제들이 늘 나를 사로잡고 있어서 남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어려워진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때도 딴생각이 종종 든다, 또한, 내가 아는 분야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으니 남의 관심사까지 챙기려면 많은 시간도 필요하다. 잘 모르는 상대에게서 칭찬할 거리를 찾는 것도 어렵기는 매한가지. 그런데 맙소사, 이름을 외우라구요? 일곱 살이 넘어가면 공룡 이름을 못 외우고, 마흔 살이 넘어가면 친구 이름도 종종 기억이 안 나고, 환갑이 넘어가면 손주 이름도 헷갈리는 게 인간이다. 딴 얘긴데, 20세기 말부터 인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로 진입해왔다. 뇌를 조금이라도 덜 쓸 수 있는 기술은 곧 혁신이 되었다. 노래방 세대는 가사를 외우지 않기 시작했고, 핸드폰이 등장하자 전화번호를 외우는 사람이 사라졌으며, 스마트폰 시대에는 스마트폰의 비밀번호조차 외울 필요가 없어졌다. 얼굴만 들이대면 되니까. 


요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쩌다 나와 잘 맞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책임과 희생이 따르는가. 어쩌면 우리는 카네기의 책을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만한 에너지가 없어서, 혹은 그만한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아서 상당수의 관계 맺기를 포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런 경향은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삶에 온전히 집중하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낳지 않게 되었고, 청년들은 비혼을 선호하고 있으니까. 챗GPT 시대에 자발적 혼밥, 혼술, 혼영화, 혼여행이 갖는 의미는 개인주의의 확대 그 이상일 것이다. 디스토피아적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영화들에서 예견하듯 A.I는 점점 지식과 엔터테이닝을 넘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 여겨졌던 교감, 관계의 영역까지 넘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마트폰이 관계를 위한 노력 없이도 외로움을 잊게 해준다면 가족, 친구, 연인 대신 기계를 택할 사람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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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3 (2023)〉 다음영화


그러나 관계 맺기를 회피하는 세태 속에 진한 가족애나 우정을 강조하는 블록버스터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가벼운 연애가 성행할수록 순애보가 담긴 유행가가 인기를 얻는 것과 같은 메커니즘일까. 5월 초에 개봉해 올해 가장 빠른 속도로 300만 명의 관객을 모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3 (2023)〉만 봐도 그렇다. 블록버스터의 화려함과 끈끈한 동지애의 감동이 잘 버무려져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죽을 위기에 처한 로켓을 구하기 위해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똘똘 뭉친다는 설정은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동료 이상이라는 전제하에 설득력을 얻었다. 어벤져스시리즈에서도 강조되듯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이들은 그들의 유니버스에서 서로에게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들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도 마찬가지다.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4 시리즈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던 이 영화는 오락적 요소로 충만함은 물론 십 대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이별의 아픔을 밀도 있게 그려내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말하자면, 최첨단 기술력으로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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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에서 만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와 닥터 스트레인지 ⓒ 다음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시리즈에 부재로 붙었던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우리 시대를 정확히 묘사한 문구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동시대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다른 차원, 멀티버스에 있는 것처럼 다양한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갖고 살아간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정답이 없어 보여서 대혼돈이다. 다만, 그럴수록 왜 많은 관객이 필사적으로 로켓을 구하려는 가오갤 멤버들에게 이입했는지, 친구들의 기억을 지워버린 피터의 행동이 아름답게 느껴졌는지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었으면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들여다본다는 철학, 그 과정 안에 정답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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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그런대로 행복한 영화 호사가

지금은 문화 전반에 관해 얘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만들고 있다.

여행 에세이집 《세도시 이야기》(공저), 짧은 소설로 릴리 이야기를 썼다.

 

 

 

 

 

섬네일 : 영화 〈닥터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27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