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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4

SPECIAL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 혹시, 순정만화도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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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순정만화도 좋아하시나요?

 

 

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Emotion Icon영화학 박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필자가 영화와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는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슬램덩크》 이야기를 해야 좋아할 거라는 걸 안다. 박스오피스 역주행에 시나브로 국내 개봉 일본 영화 최다 관객 수 타이틀까지 노리는 애니메이션, 개봉 이후 두 달 내내 극장가는 물론 문화계 전반에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놀라운 저력의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본래 7080세대의 십 대를 함께 해준 친구이자 멘토 같은 만화였다. 당시, 또래들의 문화와 유행에 뒤처지기 싫어했던 나 또한 《슬램덩크》에 얽힌 추억팔이라면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농구 하는 폼까지 서태웅을 닮았던 옆 반 그 애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러나 고백하건대, 40대 중반까지 숱하게 이사를 다니면서도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녔던 만화는 《슬램덩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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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가를 강타한 《슬램덩크》 열풍은 사회의 다양한 분야로 퍼지고 있다. © 김예슬 기자(쿠키뉴스)

 

 

《블루》에 빠져들게 된 건 이은혜 만화가의 세련된 그림체와 낭만적 대사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의 전작인 《점프 트리 A+》나 《댄싱러버》에도 일러스트 북을 방불케 하는 선남선녀들은 등장한다. 하지만 《블루》의 캐릭터들은 여느 대학 정문에서 한참 기다리다 보면 한두 명쯤은 마주칠 수 있을 것만 같은 현실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림체가 달라져서라기보다는 인물들이 하나씩 품고 있는 트라우마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던 나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내 인생의 만화는 정통순정만화, 《블루》다. 부끄럽지는 않다. 아마 《인어공주를 위하여》(이미라)나 《아르미안의 네 딸들》(신일숙), 혹은 《풀하우스》(원수연)를 꺼내 들어야 했다면 볼이 조금은 빨개졌을지도 모른다. 오해는 마시라. 그저 《블루》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대신 마니아층은 있는 작품이기에, 우리끼리의 자부심에서 나온 말이니까. 드물게도 《블루》는 만화가의 팬클럽이 아니라 《블루》만의 회원을 모집할 정도로 충성도가 높은 독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나도 물론 그 회원 중 하나여서 매달 《블루》 출간 및 각종 이벤트를 알려주는 소식지를 받을 수 있었다. 만화책에 불과했지만, 《블루》는 여러 가수가 참여한 음반을 두 장이나 내기도 했다. 록 밴드가 등장한다는 연관성 외에는 영상도 없는데 OST를 제작한다는 게 꽤 혁신적이었다. 아직도 내 서랍장 속에는 《블루》 CD와 수십 장의 일러스트 엽서들이 잠들어 있다. 

 

내가 《블루》에 빠져들었던 것은 제목이 알려주듯 인물들 안에 모두 우울하고 어두운 구석이 있다는 점이었다. 여주인공 신현빈은 미대 입시에 낙방한 후 재수를 하는 동안 타인과 소통을 끊고 외골수가 된다. 대학에 들어간 그녀는 재벌 집 첩의 아들로서 역시 상처와 애환이 많은 홍승표와 가까워지지만, 동시에 앨범 표지 작업을 하게 된 록 밴드의 리더, 신하윤에게도 끌린다. 하윤은 어릴 때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고 외롭게 자란 남자로, 《블루》의 등장인물 중에서도 가장 표면 온도가 낮은 사람이다. 다소 느슨한 삼각관계 중, 내가 집중했던 것은 현빈과 하윤의 관계였다. 나는 내 페르소나인 현빈이 하윤의 단단한 갑옷을 무장해제 시키고 그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현빈의 입장에서는 그래야 사랑을 ‘성취’했다고 볼 수 있을 테니까. 조금 덜 차가운 사람이 더 차가운 사람과 껴안았을 때 불꽃이 튀는 마법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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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에 종이잡지<윙크>에서 연재를 시작한 《블루》의 매력은 세련된 그림체와 낭만적 대사다. © 카카오스토리

 

하지만 지금 《블루》를 비평한다면, 승표와 하윤은 둘 다 어머니와의 애착 관계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미성숙한 소년들이고, 연인으로서는 절대 피해야 할 남자들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이런 남자들에게만 매력을 느끼는 현빈도 문제가 있긴 매한가지다. 만약 그래도 그녀가 둘 중 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면 응당 록 가수보다는 재벌 집 막내아들이어야 한다고 본다. 록 가수는 겉으로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앨범, 투어, 앨범, 투어를 반복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데다 여자, 술, 약이 3종 세트로 따라다니는 법이니까. 모셔야 할 (시)부모님도 없는 승표가 현실적인 선택이다. 맙소사. 나는 어쩌다 이렇게 속물이 되었을까. 《슬램덩크》와 서태웅을 닮은 옆 반 남자애 얘기를 수줍게 꺼냈어야 하는 건데...

 

 

국내에서는 순정만화가 영화화된 적이 거의 없으므로, 내가 사랑하는 영화 중 20~30대를 위한 순정만화 같은 영화, 순정만화로 출간되었으면 하는 영화 한 편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사실, 소개가 별로 필요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작품, 로맨틱 멜로드라마 장르에서 독보적인 내러티브 구조와 스타일을 가진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1995)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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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러브레터>(1995)의 국내 개봉 포스터 © 다음영화

 

〈러브레터〉는 20대 여성인 후지이 이츠키가 자신과 얼굴이 똑같은 와타나베 히로코의 편지를 받으며 시작된다. 와타나베는 후지이의 중학교 동창이자 동명이인이었던 남성과 교제하던 사이였다.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후지이는 과거로 돌아가 첫사랑을 발견하고, 와타나베는 잊지 못하던 연인과 완전히 이별한다. 얼굴이 같은 두 여성, 이름이 같은 두 남녀의 오묘한 삼각관계는 과거와 현재에 걸쳐 있고, 멀리 떨어진 공간을 넘나든다. 감히 말하지만, 이처럼 논리적이면서도 균형 잡힌 서사와 서정적인 스타일을 동시에 가진 멜로드라마는 영화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작품성과는 별개로 많고 많은 로맨스 영화 중에 〈러브레터〉를 언급하게 된 것은 ‘순정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배우는?’이라는 자문 뒤에 문득 떠오른 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루의 오래된 나무 냄새가 그대로 느껴질 것 같은 중학교 도서관. 그 창문으로 햇살과 함께 들어온 바람이 우윳빛 커튼을 일렁이게 만들 때 언뜻 보이는 한 남학생의 모습. 그는 완벽하게 순정만화의 남자 주인공을 체현體現하고 있다. 〈러브레터〉의 명장면 중 하나인 이 커튼 샷은 이와이 슌지 감독 특유의 로맨티시즘과 카시와바라 타카시라는 배우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되어 있는 샷이다. 지금도 1977년생인 그의 리즈 시절 사진들을 보면 그림 같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순정만화의 남자 주인공, 모두의 첫사랑 이미지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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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중학교 도서관. 햇살과 함께 들어온 바람에 우윳빛 커튼이 일렁이며 그 애가 보였다. © 다음영화

 

혹자는 우리 시대의 순정만화가 여성들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백마 탄 왕자를 꿈꾸게 만들었다고 비판할 것이다. 정말로, 그런 영향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이 그런 만화의 범람 속에서 십 대를 보낸 사람들이 《82년생 김지영》(조남주)을 썼고, 영화로 만들었으며, 미투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최소한 지금의 주말 드라마보다는 덜 위험한 장르가 아니었을까. 슈퍼히어로물이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묘약인 것처럼 순정만화도 안구 정화, 감수성 회복, 죽어가는 연애 세포 자극 등에 효능이 있는 장르다. 《블루》를 모르시는 분들께는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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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그런대로 행복한 영화 호사가

지금은 문화 전반에 관해 얘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만들고 있다.

여행 에세이집 《세도시 이야기》(공저), 짧은 소설로 릴리 이야기를 썼다.

 

 

 

 

 

섬네일 : 영화 <러브레터>(1995)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3262#photoId=847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