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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4

BOOK&LIFE

[SIDE B] 만화를 통해 그 시절을 함께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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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통해 그 시절을 함께 추억하다

 

이지영

교수

서울디지털대학교 상담심리학부

 

 

Emotion Icon북&라이프 side B <책과 심리학>은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교수이자 한국심리학회 공인 임상심리전문가인 필자의 글을 통해,

치유, 개선, 회복의 방법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만화는 나에게 설레고 아름다운 판타지의 세계였고, 메마른 삶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탈출구였다. 어릴 때부터 난 고민이 많았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혼자 골똘히 고민에 잠기곤 했다. 물어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였고, 난 그저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고, 각자 사는 게 바빠서 우리 남매에게 별다른 관심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학교와 가족은 버티어 내야 하는 공간이었고, 메마르고 지루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지루함을 달래는 취미 중의 하나가 만화 그리기였고 소설 쓰기였다. 특히 초등학교 때 예쁜 소녀와 소년을 그리고, 그들 간의 이야기를 곧잘 지어내어 긴 만화를 만들었다. 친구들이 재미있어하고 호응을 해주니, 나 또한 어른들처럼 만화를 연재하여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어 오래는 못했지만 잠시 동안 50원에 만화를 연재하며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본격적으로 만화방에 갔던 것은 중학교 때였다. 학교 수업 끝나고 단짝 친구와 자주 만화방에 갔다. 각자 보고 싶은 만화를 옆에 잔뜩 쌓아놓고 죽치고 보았던 기억이 난다. 따분하고 지루한 학교와 가정의 생활에서 벗어나, 만화 속 세상에 빠져들었다. 멋진 남자 주인공에 설레기도 하고, 도전과 위험에 긴장과 불안을 느끼다가 안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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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방은 만화 속 세상으로 가는 공간이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90년대 만화방 장면 © TVN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에 왔을 때,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낯선 서울 땅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이 오직 나 혼자였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나는 두 발을 땅에 딛지 못하고 공중에 붕 뜬 느낌을 받으며 방황했다. 그 시절에 내게 잠시나마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도 만화였다.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가 좋아하는 작가의 만화책을 빌리고, 크래커 하나를 사서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특히, 내가 좋아하던 작가는 강경옥 작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삶의 문제에 고민하고 해답을 찾으려 했던 나는 강경옥 작가의 독특한 이야기 표현과 흐름에 끌렸다. 만화 주인공들이 나와 동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서 쉽게 마음을 이입할 수 있었고, 그들의 심리와 감정을 굉장히 잘 묘사해내는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과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뭔가 나를 알아주는 느낌이었고, 나와 비슷한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 상담센터에서 처음 상담을 시작할 무렵, 만났던 내담자가 기억이 난다. 내담자의 부모는 기대 수준이 높고 간섭이 굉장히 심했다. 내담자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바람대로 20년 동안 살아오다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서울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며, 수업도 나가지 않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문을 닫아버렸다. 부모가 이끌림에 마지못해 상담실에 왔지만, 내담자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고 이야기조차 잘 하지 않았다. 상담을 진행하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그러다 내담자에게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만화란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니 강경옥이란다. 나는 정말 반가웠다. 내담자는 그렇게 강경옥 작가와 그의 만화 세계를 시작으로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특정 만화를 함께 좋아한다는 것은 관심사와 욕구가 비슷하다는 것을 말한다. 내담자는 상담자가 자신의 관심과 욕구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담자의 세계로 들어가 그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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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책보고 서가에 있는 <윙크 1994년 3.15호>. 강경옥 작가의 <노말시티> 15화가 실려있다. (5,000원, 헌책방나들이) 

 

 

요즘 《슬램덩크》 극장판 영화가 개봉하면서, 만화책과 함께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다. 구입하려면 한 달 정도 기다려야 하는 그 만화책이 우리 집에는 무려 시리즈 전체가 있다. 남편이 결혼 전부터 소장해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남편 또한 그 시절에 《슬램덩크》에 열광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함께 좋아함으로써 서로 간에 유대감을 느낀다. 그 유대감을 통해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함께 하고 있다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서로 각자 다른 영역에서 다른 길을 살아가지만, 특정 아이템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무리를 짓고 그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을 느끼고자 한다. 인간은 소속감을 느낄 때 그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안전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슬램덩크》의 무엇이 열광하게 만들었을까? 《슬램덩크》 붐이 일던 수십 년 전, 각자의 인생에서 치열하게 방황하고 고민하던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슬램덩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체 스토리라인이다. 한마디로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들의 성장기를 보여준다. 농구에 재능이 있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원석, 뛰어난 것 없이 평범하지만 성실한 조연, 불우한 가정 형편으로 힘들게 성장하는 인물들 등 《슬램덩크》 속의 주인공 중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유아독존,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른다. 모두가 자신이 최고임을 세상에 보여주겠다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정 가득하다. 진지하고 심각하고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 모습이 어쩌면 잊고 있었던 우리들의 젊은 시절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에게도 이상과 꿈이 있었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세상에 대해 비장한 마음으로 부딪혀 보려는 패기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무대에서 서서히 내려올 준비를 해야 하는 중년의 지금, 열정은 식어버렸고 설렘은 느껴본 지 오래다. 열정은 자극과 대상에 대한 흥분의 반응이고 에너지이다. 더는 기대와 욕구가 없으니 열정과 에너지도 없고, 흥분되고 설레는 감정을 잘 느끼기 어렵다. 생기 있고 살아있는 느낌이 들기 어렵다. 그래서 삶이 자칫 무료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슬램덩크》 속의 인물들과 스토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과 패기가 넘친다. 그 시절의 나, 우리처럼 말이다. 그러니 반갑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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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램덩크》의 캐릭터들이 가진 열정과 패기를 통해 과거의 나, 그 시절의 우리를 추억한다. © KBS 


《슬램덩크》의 아직 갈고 닦이지 않은 원석들은 젊은 시절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내가 어떤 능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와서 좌충우돌 부딪히고 깨지고 아파하며 사회에 적응해갔다. 또한 나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다스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과정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서투른 우리는 쉽게 무시당했고 집단 안에서 밟히기 일쑤였다. 그 시간을 버티어 내는 것은 여간 힘들고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버티어 내는 힘이다. 《슬램덩크》의 주인공들은 그 시간을 버티어 낸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무시하고 짓밟아도 버티어 내고, 그 힘으로 결국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는 기회를 만들어 낸다. 평범하고 능력이 출중하지 않지만, 그 장점을 갈고 닦아 결국엔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도 있다. 우리 모두의 바람이지 않았을까. 또한 포기하지 않는 것!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자신의 진정한 욕구와 목표를 향해서 굴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엔 《슬램덩크》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까. 《슬램덩크》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성장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그 시절의 열정을 추억하고, 지금껏 잘 버티어 왔음을 인정하고 칭찬해본다. 참으로 수고했고 애썼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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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교수

서울디지털대학교 상담심리학부

 

서울대 심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고,

감정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감정을 이해하고 다루도록 코칭하고 있다. 

《정서 조절 코칭북》, 《생각이 크는 인문학:감정》, 《어린이 심리 스쿨》,

《나를 잃어가면서 지켜야 할 관계는 없다》등의 다수의 감정 관련 저서를 출간했다.

KBS1 라디오 <정용실의 뉴스브런치>의 <뉴스브런치 부설 심리연구소>에 고정 출연하고 있고,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이지영 교수의 감정코칭>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섬네일 : 강경옥 《노말시티 1》 표지 © 네이버 도서 https://url.kr/5qac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