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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4

INSIDE

[세렌디피티] 1990년 여름, 홍익서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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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dipity 
예기치 않은 메모나 물건을 발견하다
 
1990년 여름, 홍익서적에서
《태백산맥》에 꽂혀있던 책갈피
 
 
세렌디피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상징적인 사물은 오래된 책갈피입니다. 세계적(?)인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해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삽화(‘일러스트’라기보다 ‘삽화’라고 써야 할 것만 같음)가 간단히 들어가 있는 오래된 코팅 책갈피. 그리고 뒷면에는 명언과 서점 홍보 내용이 들어가 있는 형식으로 완성되는 1980~90년대식 서점 홍보용 코팅 책갈피 말이죠.


오늘도 1990년이 막 시작됐을 때 발행된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4권 제19판 사이에 살포시 끼워져있던 책갈피 하나를 가져와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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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책갈피를 간직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이 책은 1987년 11월에 초판이 발행된 한길사 버전 《태백산맥》 4권입니다. 《태백산맥》은 모두 10권으로 완간된 장편 대하소설인데요. 1986년에 제1부 세 권이 나오고 1989년에 열 권이 완간되었으니 이 헌책 주인은 《태백산맥》이 완간된 기념으로 한 권 한 권 읽어나가기 위해 이 4권을 골랐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헌책 주인은 1990년 1월에 발행된 제19판을 1990년 여름에 산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요? 뒤표지를 한 장 넘기면 책 구입날짜가 적혀 있기 때문이죠.Emotion 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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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여름, 이 책의 주인은 ‘영등포시장 로타리(조흥은행 건너편)’에 있는 ‘홍익서적’에서 이 책을 구입합니다. 이건 그 책 사이에 숨어있던 책갈피가 알려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전에 ‘홍익서적’에서 다른 책을 사고 받은 책갈피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우리는 이 책과 책갈피에만 집중해봅시다.) 


책갈피 자체만 살펴봐도 흥미로운 구석이 한가득입니다. 먼저 책갈피에 적힌 시 한 번 읽어볼까요.    

 


‘사랑의 노래’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하늘색 물망초 혼자

피었네

물결이 밀려와

입맞춤 하니

사라지고 잊어버리네

<알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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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 ?(글씨가 잘 안 보입니다)가 쓴 시의 일부로 보이는 한 구절이 적혀 있네요. 그런데 이 시 제목은 ‘사랑의 노래’일까요, ‘물망초’일까요. 분명 제목 자리에 ‘사랑의 노래’라고 적혀 있는데 갑자기 ‘물망초’가 세로로 적혀 있어 조-금 헷갈립니다. 


시의 내용 때문인지 삽화에는 시냇가까지는 그려져 있는데 갑자기 왜 농부가 수확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냇가까지 그 내용을 잘 따라가다가 좀 아리송한 예술 세계로 끝이 나네요.Emotion Icon


이 책갈피의 핵심은 사실 뒷면에 있습니다. 여기에 서점에 대한 실질적 홍보 정보가 적혀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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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서적

678-4273

영등포시장 로타리

(조흥은행 건너편)



이렇게 적어놓았지만 뭔가 허전함을 느꼈던 홍익서적 사장님. 명언 하나 적어넣습니다.

 


책을 읽음에 있어 어찌 장소를 가릴 것이랴

-이 황-


 

여기에 책 아이콘 하나 살짝 얹으면서 마무리. 이렇게 앞뒤로 책과 관련한 콘텐츠로 꽉꽉 채워 넣고 뿌듯한 마음으로 곱게 코팅기에 이 작은 책갈피를 넣으셨을 홍익서적 사장님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릅니다. 


마지막으로 홍익서적이 있던 위치 설명 한 번 살펴보고 갈까요? 

 


영등포시장 로타리(조흥은행 건너편)


 

여러분 혹시 ‘조흥은행’ 아세요? ‘조흥은행’은 이제는 사라진 아니 신한은행으로 합병되어 그 이름만은 사라져버린 은행이랍니다. 그렇게 이름은 사라졌지만 ‘조흥은행’은 한국 최초의 민간 상업은행이었다는 점은 기억하면 좋겠어요.

 


1897년 2월 1일 한성은행(漢城銀行)으로 설립되어, 1943년 10월 동일은행(東一銀行)을 합병하여 현재의 상호로 변경하였다. 1956년 3월 3일 기업공개를 통해 주식을 상장하였고, 1963년 4월 외국환 업무를 개시하였다. 1989년 8월 조흥리스(주)를 설립하였고, 1992년 조흥투자자문(주)을 인수하였으며 1999년 4월 충북은행과 강원은행을 합병하였다. 1999년 9월 고객만족경영 최우수상 수상, 2002년 11월 한국능률협회 선정 '고객만족경영대상'을 수상하였다. 2006년 4월 1일 옛 신한은행과 통합하여 (주)신한은행으로 다시 출범하였다.

_출처: ‘(주)조흥은행 [Cho Hung Bank, (株)朝興銀行]’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렇게 오래된 책갈피를 발견한 덕분에 한국 최초 민간 상업은행 이름이 뭔지도 알게 되었네요. 우연한 발견, 세렌디피티는 우리에게 잊힌 무엇을 알게 해주는 그런 일을 선물해주나 봐요. 최초 민간 상업은행 이름 그리고 지역 서점에서 책을 샀던 추억, 지역 서점에서 서점 이름과 시가 새겨진 소박한 책갈피를 제작했다는 그런 아련한 추억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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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네일 : 영화 <태백산맥>(1994)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