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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3

SPECIAL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 나를 사랑하는 가장 OOO 방법,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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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가장 OOO 방법, ‘취향’

 

 

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Emotion Icon영화학 박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필자가 영화와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장이 있는 영화 이야기>는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미소’는 위스키를 사랑한다. 우아한 곡선을 가진 유리잔에 늦가을 빛깔의 위스키가 담기면 미소는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그윽한 향을 몸속 깊숙이 받아들이며 하루의 고단함을 잊는다. 

미소는 담배를 즐긴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맑은 갈색 눈동자는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에서 더 신비로워진다. 

미소에게는 남자친구가 있다. 좋은 스펙과는 거리가 멀고, 빼어난 용모도 아니며, 공장 기숙사에 살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지만 미소는 착하고 다정한 ‘한솔’을 사랑한다. 

그런데 위스키와 담배, 한솔만 있으면 행복한 서른 살의 가사도우미 미소에게 고민이 생긴다. 위스키값도, 담뱃값도, 지하 단칸방 월세도 오르는데 자신의 일당만 오르지 않는 것이다. 미소는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이리저리 머릿속 주판알을 굴려보다 짐을 싼다. 비싼 기호식품을 계속 즐기기 위해 그녀는 집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때부터 미소는 10년 전 밴드 활동을 함께 했던 대학 선후배들을 찾아가 잠잘 곳을 부탁하는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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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소는 취향을 지키기 위해 포기를 결심한다.  © 다음영화 <소공녀>

 

철이 없는 건지 자존심이 없는 건지는 몰라도 대책이 없는 것만은 확실한 미소는 영화 <소공녀>(감독 전고운, 2018)의 주인공이다. 과연 이런 인물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 전고운 감독은 자신이 미소처럼 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기 때문에 영화 속 캐릭터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내 임금만 빼고 오르는 물가, 영끌로 매입하는 아파트, 전략적 결혼 등 동시대 사회상을 미러링하는 가운데 다분히 판타지가 가미된 인물을 앞세운 것은 <소공녀>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다. 미소는 논문을 쓰는 친구의 집 청소를 하고 일당을 받을 때도, 오랫동안 연락 못 했던 밴드 멤버들에게 갑작스레 잠자리를 부탁할 때도, 영화표를 얻기 위해 헌혈을 할 때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격지심 때문에 상냥함을 잃거나 자조감에 빠지는 법도 없다. 자의든 타의든 미소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던 밴드 멤버들은 담배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린 미소에 대해 ‘웃는 게 예쁘고, 밥을 잘하며, 멋있고 귀여운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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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소는 대책 없이 행동한다. 하지만 미소는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고 주변 사람은 미소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 다음영화 <소공녀>

 

그러나 이들이 사회적 잣대로는 아웃사이더에다 루저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미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근거는 사실 따로 있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했다. 대부분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의 욕망에, 또래 집단의 욕망에, 미디어가 제시하는 욕망에 잠식되어 그것을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점심 대신 링거를 맞아가며 일하고, 20년 동안 월급을 바쳐야 할 아파트에 스스로 감금되고, 자기 취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돈 많은 시댁에 삶을 의탁하고 있는 미소의 선후배들이 좋은 예다. 그들은 이미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동일시한 지 오래이므로 그런 인생이 딱히 잘못되었다는 자각조차 없지만, 항상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미소가 특별하다는 것만큼은 인지하고 있다. 미소는 타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취향을 지켜내고자 하며, 그 대가를 치르는데 망설임이 없다. 밴드 멤버들이 그녀에게서 정말 부러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사실, 감독이 독서나 클래식 감상처럼 고상해 보이는 취미 대신 위스키와 담배를 미소의 손에 들려준 것은 다소 짓궂어 보인다. 누군가는 미소가 몸에 해로운 취향 따위에 집착하다가 위장병이나 폐병에 걸려 30대에 죽을 거라고 빈정댈 것이 뻔하다. 그러나 술이나 담배는 대표적인 기호식품이고, ‘기호’는 취향의 유의어이기도 하므로 취향의 중요성을 말하는 ‘소공녀’에서 미소가 이 두 가지를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다. 잘 만든 영화에서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소는 라캉의 명제에 온몸으로 저항하면서도 크게 갈등하거나 방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계를 벗어나 있다. 영화의 장르가 SF였다면 미소는 슈퍼 히어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독립하고, 고만고만한 동네 친구들, 대학 동창들과 멀어져 넓은 세상을 접하다 보면 미소와 비슷한 선택을 하며 사는 사람들도 가끔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쓰는 에세이는 소설보다 강렬하다.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달, 2013)의 김경 작가는 ‘취향이란 인간 그 자체다.’라는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하면서 취향이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무언가라고 말한다. 또한, 그녀에게 취향은 영혼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직관적 단어이며, 소울메이트인 남편을 만나게 해준 보물이기도 하다. 김경 작가는 패션지 에디터로서 15년 동안이나 도시의 화려한 곳을 누렸던 자칭 닳고 닳은 마흔 즈음의 여자였는데, 시골에서 6년째 은둔생활을 하던 남루하고 고독한 예술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서문에서 ‘내 취향이 그를 찾아냈다’라는 로맨틱한 문장이 혼자 사는 사십 대 중반의 비평가에게 다소 부대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만천하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작가의 당당함에는 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취향과 삶이 빼곡히 담긴 글을 읽어내려가며 취향의 농도와 매력의 깊이에는 비례관계가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 책은 미소라는 캐릭터가 감독의 어떤 자아와 무의식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관객들이 왜 그녀에게 애정을 갖게 되고, 응원하게 되는지 알려주는 해설서와도 같다. 작가와 나, 그리고 미소 사이의 교집합과 공집합을 구체화해 보는 즐거움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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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향의 농도와 매력의 깊이에는 비례관계가 있다.

 

 

오직 취향을 따라 영화를 공부했지만, 직업적으로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동안 소진되어갔던 나 자신을 다시 찾기 위해 장기간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백수를 자처하고 통장이 텅장이 되는 만용을 부리면서 나는 문화예술의 중심지를 누볐다. 지인들 모두를 부럽게 했던 그 호사스러운 여행의 결과로 나는 파리와 뉴욕 중 어느 도시가 더 나와 맞는가 하는 즐거운 고민도 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취향의 정수는 어쩌면 작가주의 영화나 인상파 미술이나 브로드웨이 공연이 아니라 그것을 누리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용기와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언컨대, 취향을 추구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티 나는 것 중 하나다. 그러고 보니 그 인생 여행을 다녀온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새해도 밝았는데 이쯤에서 다시, 취향 드러낼 결심을 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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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작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그런대로 행복한 영화 호사가

지금은 문화 전반에 관해 얘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도 만들고 있다.

여행 에세이집 《세도시 이야기》(공저), 짧은 소설로 릴리 이야기를 썼다.

 

 

 


섬네일 : 영화 <소공녀>(2018)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9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