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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3

BOOK&LIFE

[SIDE A] 취향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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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나

 

심귀연

교수

경상국립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근대 이후 개인주의가 등장하면서 일상적 삶을 사는 우리는 남들이 모두 ‘예’라고 말할 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자 했다. 우리의 일상은 흔히 말하듯 ‘묻어가는’ 삶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다수의 선택에 안정감을 느끼지 않는가. 여행지에서는 블로거들이나 인플루언서들이 추천한 장소를 가야 안심을 하듯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근대의 개인주의로 인한 단절과 소외의 경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갈등한다. 묻어갈 것인가 아니면 외롭더라도 외로운 선택을 할 것인가? 물론 이러한 개인의 실존적 문제 외에도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사이에서, ‘개인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라는 물음 앞에서도 우리는 머뭇거리게 된다. 개인은 사회 혹은 공동체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에 대해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자유로운 영혼의 상태일 수 없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자. 자신이 처한 상황 혹은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현실을 벗어난 낭만은 낭만으로 남기자. 우리에게 자유는 메를로퐁티가 말하듯 조건 지어진 자유일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영혼으로서의 개인은 희망 사항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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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사회 혹은 공동체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자유로운 영혼의 상태일 수 없다. ⓒ심귀연 

 

마찬가지로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특정 시대적 상황을 벗어나 말할 수는 없다. 진열된 옷장에서 옷을 골라 입으며, 주머니 사정을 보고 여행지를 고른다. 이처럼 내게 주어진 조건, 선택할 수 있는 한계적 상황 안에서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선택한 것들이 모여 나의 취향을 만들어낼 것이며, 이로써 나는 고유한 내가 된다. ‘나’라는 존재는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이면서도, 다른 이들과 공유되는 삶의 방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나는 나 이외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존재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나는 조건과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고, 나는 그러한 자유를 취향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선택을 위한 상황적 조건이라고 하지만, 그 모든 선택이 존중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취향은 누구의 간섭도 받을 수 없지만,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취향으로 존중받을 수는 없다. 즉 내가 취향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취향은 근대적 개인이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다. ‘나’의 자유를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무엇인지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본질’을 규정하려는 태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의 내 선택과 내일의 내 선택이 모여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게 어떤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오늘과 내일이 만든 것이다. 오늘의 내가 산과 들을 헤매며 꽃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면 내일의 나는 도시의 숲을 헤매며 도시의 골목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을 만나는 즐거움에 취할 수도 있다. 꽤 변덕스러울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변덕스러움이 시간의 옷을 입으며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 스타일을 취향 덩어리라고 부르고자 한다. 지금은 취향 덩어리들이 ‘나’라는 고유한 스타일로 개체화되어 나타나는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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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내 선택과 내일의 내 선택이 모여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게 어떤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오늘과 내일이 만든 것이다. ⓒ심귀연

 

취향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취향을 말할 수 있는 시대, 자기만의 스타일이 존중받는 시대가 된 것을 의미한다. ‘취향’이 ‘나’인 시대이다. 세상의 고민을 다 떠맡은 듯 고뇌에 잠겨야 할 것 같은 철학자가 짙은 검은 색의 눈화장과 립스틱을 바르고, 락 가수들이 즐겨하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강의를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취향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그대’가 된다. 그런데도 누구나 취향을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나는 아직은 검은색의 눈화장과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가죽 재킷을 입고 강단에 설 용기가 없다. 나에게는 선생다운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 요구된다. 그뿐인가, 나는 그냥 선생이 아니라 ‘여’선생으로서의 태도와 스타일을 요구받는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강단에 설 때는 나름의 각오를 해야 한다. 게다가 나의 찢어진 청바지는 엉뚱하게도 나의 능력을 의심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취향이 존중받는 시대라고 말하지만,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존중받지 못하는 나의 취향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하는 시대이다.

 

왜 누군가의 취향은 존중받지 못하는 것일까? 나에게는 취향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격이 맞지 않은 일로 평가되는 것일까? 게다가 왜 어떤 취향은 타인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이유로 부정되는 것일까? 단지 불쾌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취향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래서 취향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누군가의 취향을 판단하고 있다면, 나는 그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며, 누군가가 나의 취향을 판단하고 취향을 조절하고자 한다면 그가 나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취향은 판단의 문제도 권력의 문제도 아니다. 취향의 시대, 우리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복잡한 심경을 벗어버릴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건, 또 선택하건 그건 내 취향이다. 그러니 누군가, 나의 취향에 간섭한다면, 말해보자. “취향 존중 좀 해주시죠!”라고. 그렇게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가 나이고자 한다면 용기를 내보자. 상대방의 취향에 무관하게 나의 취향이 존중될 때 나는 나로서 살아갈 수 있다. 누군가의 취향이 나에게 불쾌를 유발할 수도 있으며, 나의 취향이 타인에게 불쾌를 줄 수도 있다. 또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차라리 그런 평가에 둔감해져 보자. 미움받지 못할까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 누구도, 심지어 사랑의 이름으로조차도 타인이 내게 나의 스타일 혹은 취향에 간섭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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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향의 문제인지 아닌지...

  

취향은 판단될 수 없지만, ‘무엇’을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어디서든지 무슨 노래든지 부를 수 있다. 그 노래가 시대에 뒤떨어진 노래이거나 어떤 누군가는 싫어하는 곡조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군가가 내게 자신이 듣기 싫은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사람과 나의 노래 취향이 다를 뿐이다. 참고 들어주거나, 듣기 싫은 사람이 그 자리를 벗어나면 된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노래를 부른다든지, 시내버스에서 춤을 춘다면 그것을 취향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질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삭발하고 다니건, 남성이 긴치마를 입고 다니건 그것은 공공질서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취향은 존중받고 어떤 취향은 존중받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취향의 문제인지 아닌지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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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귀연

교수

경상국립대학교 인문학연구소

 

〈메를로퐁티의 자유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현상학적 방법론을 토대로 하여 생태, 여성 및 비인간존재들에 관한 연구로 확장 진행 중이다.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오이코스인문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단독저서로 《신체와 자유》(그린비, 2012), 《철학의 문》(지앤유, 2014),

《몸과 살의 철학자 메를로-퐁티》(필로소픽, 2019), 《취향》(은행나무, 2021),

《내 머리맡의 사유》(경상국립대학교출판부, 2022)가 있으며

공동저서로 《지구에는 포스트휴먼이 산다》(필로소픽, 2017),

《인류세와 에코바디》(필로소픽, 2019) 등 다수가 있다.